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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딛자마자 알 수 있었다. 여기는 안심할 수 있는 섬이라는 것을. 유명한 여행지 특유의 콧대도 없거니와 왁자지껄한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낯선 이방인의 심장 소리는 해변의 파도와 함께 공명하며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간다. 남태평양 한가운데 동동 떠 있는 이 섬의 투명한 바다색, 하얀 산호모래가 너무도 이국적인데도 섬은 친숙하다. 쓸데없는 긴장감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는 곳. 수수한 멋으로 눈이 부신 티니안을 방문하는 여행자는 이 섬의 주인이었던 거인의 품에 안긴 것마냥 안도감이 들 것이다.

티니안 글=양보라 기자 사진=양보라 기자, 마리아나관광청
취재협조=마리아나관광청 www.mymarianas.co.kr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도 남음 직한 인터넷의 잡학스러움도 ‘티니안’은 살짝 비켜 갔나 보다. 티니안으로 떠나기 전 생경한 그 이름을 검색해 보니 한국어판 위키피디아는 단 한마디를 전하는 게 전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 ‘리틀보이’를 폭격기에 탑재했던 장소란다. 그렇게 시작된 역사상 최초의 핵 공격으로 2차 세계대전은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고. 역사가 유의미하게 기억하고 있는 티니안은 일본과 미군의 전초기지로 사용됐던 그때에 정지해 있는 듯하다. 나 역시 방문을 하기도 전에 이미 티니안을 전부 아는 것 마냥 자만했다. 같은 북마리아나제도에 속해 있는 사이판이 육안으로 보이는 위치에 있으니 끼리끼리 닮았겠거니 했다. 전쟁의 상흔을 씻고, 몸단장을 마치고 이제는 여행객들을 불러 모으는 관광지로 탈바꿈한 섬일 거라고 쉽게 치부했다.

■모든 것이 바뀌는 10분

언제부턴가 여행지와 경쟁을 벌이는 못된 버릇을 들였나 보다. ‘날 감동시키지 못하면 아류 관광지일 뿐이야’라고 먼저 벽을 쳤다. 하지만 티니안은 첫 대면에서부터 기쁜 마음으로 ‘항복’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여행에 앞서 예단과 속단을 밥 먹듯 하는 누구라도 이곳에서는 ‘지는 싸움’을 할 게 뻔하다. 티니안은 첫인상부터가 장관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티니안을 하늘에서 먼저 만나게 된다. 입도하기 위해서는 사이판 국내선 공항에서 뜨는 7인승 경비행기를 이용한다. 무게 제한이 있어 공항에서 승객과 짐의 무게를 일일이 재야 한다. 놀러와서까지 저울 위에 올라간 여행자는 살짝 마음이 상했을 수도 있다.

앙증맞은 비행기를 보곤 과연 제대로 뜰 수 있을까 싶은 의심까지 싹 튼다. 여기서 추락하면 알아서들 바다에서 헤엄치라는 기장의 엄포가 스릴을 더한다. 하지만 장난감 같은 비행기의 문이 닫힌 뒤, 가볍게 하늘로 솟아오르고 나면 걱정과 근심은 남아 있을 자리가 없다. 작은 섬을 감싸고 있는 투명한 바다의 빛깔, 섬의 가장자리를 빙 두른 모래 해변에 부딪히는 파도의 흰 포말…. 긴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높은 시점에서 굽어보는 티니안의 모든 것들은 특별하다. 그렇게 여행자는 섬의 경관에 이미 매료된 채, 10분간의 파노라마를 즐기곤 착륙하게 된다.




■지구의 지름에 다가서다

드디어 티니안 섬에 안착한다. 이국적 향취에 목마른 이방인은 들뜬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이곳에서는 조급할 필요가 없다. 섬은 제주도 면적의 1/10에 불과하고 북마리아나 제도 유인도 가운데 인구가 가장 적은 곳이라 마치 무인도에 온 것처럼 느긋하다. 대중적인 휴양지인 사이판에 뒤처지지 않는 자연환경을 갖췄으나 유명한 관광지 특유의 혼잡스러움과 번잡함이 없다. 때로는 세공되지 않은 원석이 보석보다 더 빛나는 법. 아직 여행자에 의해 점령되지 않은 섬은 대중교통도 없고 숙소도 많지 않지만 그래서 더 좋다. 자극적이지 않은, 섬의 순박함이 더욱 특별하다.

비행장에서 차로 5분 거리에는 섬의 중심가인 산 호세 마을(San Jose Village)이 조성돼 있다. 시청, 학교, 병원, 호텔 등 주요 시설이 여기에 모여 있고 섬의 주민 대부분이 이곳에 살고 있다. 1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마을은 우리로 치자면 읍내와 같다. 다만 티니안식 읍내는 시간이 훨씬 느리게 흐른다. 옷을 훌렁훌렁 벗고 축복 같은 날씨를 즐기는 사람들이 어슬렁거리며 운치를 더할 뿐이다. 섬에서 태어난 원주민들은 일할 필요가 없다. 국가가 주는 보조금으로 충분히 생활할 수 있어서 목축이나 낚시로 하루를 즐긴다. 여행객을 생업의 표적으로 삼지 않지 않는다는 것이 티니안이 가진 고요함의 비밀일 수도 있겠다.

숙소에 여정을 풀고 티니안 여행의 백미인 해변을 거닐어 본다. 티니안의 해변은 작지만 야무지다. 현지인도 외부인도 가장 아름다운 경치로 꼽는 곳은 티니안 다이너스티 호텔 바로 앞에 위치한 타가비치(Taga Beach)다. 해안선은 북위 15도에 위치한 이곳이 적도와 근접한 땅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만든다. 눈앞의 해안선은 컴퍼스로 그려놓은 듯 둥그스름하다. 지구의 지름에 가까워진 여행자는 자신을 에워싼 해안선이 신기할 수밖에 없다. 지구 끝에 다가서듯 여행자들은 자유롭게 수영이나 스노클링을 즐긴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스치듯 지나간다면 어디에서나 볼 법한 바닷가겠지만 이곳은 몇천년간 이 섬의 주인이었던 추장의 시선이 닿았던 곳이다. 선사시대부터 티니안을 다스려 온 종족은 차모로족(Chamorro)이다. 차모로족의 추장은 바로 이곳 타가비치 주변에 오늘날 타가하우스(Taga House)라고 불리는 거대한 신전을 지어놓고 자신의 영토를 오래도록 굽어봤다. 지금의 신전은 거대한 돌기둥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 길이가 6m에 달해 당시의 위용을 상상할 수 있다. 주변에는 건물을 지을 만한 돌이 없기 때문에 거대한 돌덩이를 ‘거인’이 어디선가 옮겨 왔다고 전해진다.
‘거인들의 섬’이라는 전설 때문인지 티니안 섬에는 거인의 흔적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티니안 해변가에 블로 홀(Blow Hole)이 대표적이다.




★Tinian Point
티니안을 제대로 여행했다 말하려면 짚어줘야 할 포인트

▶‘별 볼 일’ 있는 출루비치
이 해변에서 사람들은 바다보다 모래에 더 관심이 있다. 아직 풍화작용이 덜 끝난 산호모래가 별 모양을 띠기 때문이다. 손바닥으로 모래를 찍어서 들여다보면 내 손 안에 별 하늘이 열린다.

▶최고의 다이빙 포인트, 타촉냐 비치
비치 여기저기에 나무그늘이 만들어져 있어서 잠시 동안 태양을 피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수심 또한 얕은 편이라 티니안 바닷가의 수많은 열대어를 감상하기 딱이다. 해양 액티비티를 신청할 수 있는 부스가 있다.

▶‘소원을 말해봐’ 바다거북 스노클링
티니안에는 우리 식으로 치면 천연기념물인 바다거북의 서식지가 있다. 이 일대를 둘러보는 스노클링 코스는 관광객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땅에서 보던 거북이만을 떠올리며 늦장을 부렸다가는 재빠르게 헤엄치는 거북이를 놓치고 만다. 운이 좋으면 자고 있던 거북이를 만져보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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