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나는 주일미사가 시작되기 10분 전에는 성당에 들어와 앉는다. 그러나 지난 일요일에는 새벽부터 번역 일에 코 박고 있다가 임박해서야 시계를 보고 한참을 달려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사람들로 꽉 찬 작은 성당 뒤에서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성당 양쪽 벽을 따라 추가로 간이의자가 한 개씩 길게 놓여있는 곳 말고는 앉을 데가 없었다. 간이의자도 감지덕지다 싶어 딱딱한 자리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때 조용한 실내에서 중절모를 쓴 구부정한 노인이, 갑자기 제대 앞 가운데 두 번째 줄 가장자리에 앉아있는 어떤 이에게 “여기는 내 자리니 비키라”며 당연한 듯 요구했다. 막무가내였다. 앉아있던 이가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노인에게 선선히 자리를 양보했다. 말씨름 해봤자 시간 낭비요 자기만 손해라는 걸 간파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늘 앉던 자리가 아닌 곳에 앉으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하고 불안해한다. 자신의 불찰로 지각했음에도 이 완고한 노인은 그런 경향이 심했던 모양이다. 평소 왼쪽에 앉아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 제대를 바라보며 앉던 내가, 이번에는 오른쪽에 앉아 중앙에 있는 제대를 향해 왼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바라보는 방향과 각도가 다르니 놀랍게도 다른 세상이 거기 있었다. 벽에 있는 성모마리아 상과 성인 조각상은 지난주처럼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자리에 서 있었건만, 앵글이 다르니 ‘누구시더라’ 할 만큼 달라보였다. 불편하고 불안하다기 보다는 ‘어, 이렇게도 보이네’ 하는 새로운 시각과 인식이었다. 저쪽에서는 안 보이던 성당 벽의 사소한 장식도 눈에 들어왔다. 모르는 성당에 들어온 것처럼 한참동안을 두리번거렸다. 눈에 익숙하지 않은 낯선 이 상황이 신기하기만 했다. 

문득 역지사지라는 말이 생각났다. 남의 입장이나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보라는 뜻이다. 허나 처음 앉은 자리에 그대로 눌러 앉아있으면서 반대쪽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기란 보통사람에겐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새삼 실감했다. 실제로 자리바꿈 해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기가 쉽지 않다. 내가 왼쪽에서 제대를 바라보았을 때의 성당 안 풍경은, (물리적으로 자리를 옮겨) 오른쪽에서 제대를 바라보았을 때의 그것과는 생각보다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무릇 모든 인간관계와 세상만사가 이럴 것이다. IS의 파리테러, 알카에다 연계 단체의 말리 호텔테러, 세계 각지에서의 크고 작은 자폭테러, 국내에서는 여당과 야당의 힘겨루기는 물론 광화문 폭력집회와 경찰의 과잉대응 문제…. 이렇듯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힌 그룹 사이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역지사지의 인식 변화가 절실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각자의 자리에서 한 발짝의 움직임도 없이 고집스럽게 눌러 앉아있으면서 자신의 주장만 세상에 외치고 있다는 점이다. 물리적인 공간 개념의 중간이 아니라, 균형 잡힌 인식의 중립은 기대할 수 없는 건지 요즘 들어 더욱 안타깝고 답답하다. 보통 사람은 보통이어서 그렇다 치고, 적어도 특정 단체의 지도자나 국민이 뽑은 지도자(국회의원도 물론 포함된다)는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정 어렵다면 그럼 잠시만이라도 역할을 바꿔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신문기자였다가 대학에서 후학을 길렀던 리영희 교수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책을 몇 번씩 되풀이해서 읽은 적이 있다. 나중에서야 책 제목이 마틴 루터 킹의 연설에서 인용되었다는 걸 알았지만, 어쨌든 이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당신네들, 하늘을 나는 저 새를 보시오. 저 새가 오른쪽 날개로만 날고 있소? 왼쪽 날개가 있고, 그것이 오른쪽 날개만큼 크기 때문에 저렇게 멋있게 날 수 있는 것이오.”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이 이 말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양 날개를 가진 새가 오른쪽 날개로만 날개 짓을 할 경우 새는 왼쪽으로 기울어지며 떨어진다. 반대로 왼쪽 날개만 퍼덕이면 오른쪽으로 고꾸라진다. 작가 이문열은 1988년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는 제목의 소설을 썼다. 세상의 날 수 있는 것들은 날개가 있기 때문에 추락하고, 날개가 있기 때문에 다시 비상할 수 있다는 의미 또한 이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상이 변화되면 시대에 맞게 사고와 인식도 변화되어야 한다. 어느 쪽이든 기왕에 서 있던 자리와 입장에서 한 치의 움직임 없이 사고와 인식과 행동이 변하지 않은 사람을 나는 ‘꼰대’라고 부른다. 어느 쪽이든 처음 있던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발을 떼 자신이 서 있는 반대쪽으로 1cm라도 움직인 사람을 나는 ‘진보’라 부른다. 나라 안이건 나라 밖이건 요즈음의 혼란은 극단에 서서 꼼짝도 안 하고 있는 이런 ‘꼰대’들이 극성을 부리기 때문이다. 이들 때문에 안 그래도 어려운 관광업계가 더 곤경에 처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다. 다음 주 성당에 갈 때는 일찌감치 집을 나와 아직 한 번도 앉아보지 않은 제대 중앙에 앉아보리라. 
 
맥스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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