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일 수도 있고 집착일 수도 있다. 가끔 정신병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걸리면 한 놈만 팬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한 번 좋아하기로 마음 먹으면 바람 피지 않는 한 어떤 찌질한 짓을 하거나 못되게 굴어도 끝까지 믿고 기다려 준 것 같다. 연예인은 성시경만 12년 째, 소설가는 김연수다. 좋아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앞으로 5년은 기본이다. 그를 요새 자주 만나고 있다. 일방적으로 내가 데이트 비용을 쓰고 있으니 그는 참 좋겠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는 걸 ‘전작주의’라 하는데, 이 단어는 조희봉 작가가 <전작주의 자의 꿈>에서 만들어 낸 신조어로, 어느 한 작가의 모든 작품 및 그 작품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다른 작품들까지 두루 읽는 걸 말한다. 요즘 김연수 성애자가 되어 그의 책으로 책상이 온통 범벅이다. 
김연수는 대중과 평단의 고른 사랑을 받는 작가로 등단 후 20년 간 17권 이상을 생산했고, 동서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두해가 멀다하고 수상했다. 다작(作)했고 다상(賞)도 했다. 결코 쉬운 일 아니다. 

그를 처음으로 만난 건 4개월 전, <우리가 보낸 순간>이다. ‘여자구나…’ 그것도 숱한 사랑과 이별로 마음이 누덕누덕 해진 사십 초반의 미혼 여자. 이름도 오해할 만하지 않은가. 그가 이런 센님 같은 외모의 남자사람이라는 반전 덕에 그 후로는 오롯이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우.보.순>은 절절하다. 

너무 무겁지도 않으면서 김연수 다운 책을 하나 소개하라면 <소설가의 일>이다. 세 번째 읽는 중이다. 소설이 아니라도 글 좀 잘 쓰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 (사실, 우리 다 그렇지 않은가) 싶으면 이 책 좋다. 게다가 김연수가 썼다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다. 키만 좀 컸더라면 성시경의 입지가 위태로울 만큼). 

요지는 이거다. “매일 글을 쓴다. 한 순간 작가가 된다.” 무조건 열심히 쓰라는 건가? 다독, 다작, 다상량같은 소리하려고 했으면 이 글을 쓰지도 않았다. 김연수가 주는 글 잘 쓰는 비결 팁 세 개. ‘핍진성’, ‘생각하지 말고 감각할 것’ 그리고 ‘나만의 미문을 얻어라’다. 핍진성이란 단어를 이 책에서 처음 들어봤는데, 라틴어구로는 베리 시밀리스(veri similis)다. 베리(매우), 시밀리스(유사하다). 말 그대로 실물감(lifelikeness)이다. 리얼리즘과 헛갈리지 말아야 할 것은, 텍스트 외부의 현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텍스트의 장르 안에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진실성이다. 특히 소설에서 진실이란 반박할 부분이 한 곳도 없는 완벽한 이야기(81p)를 말한다. "진짜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이런 마음이 들게끔 하는 완벽에 가까운 구라. 소설에서 핍진성이 핵심인 이유는, 소설을 읽는 다는 것, 쓴다는 것은 사랑에 빠진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연애편지를 쓸 때를 생각해 보라. 그/그녀는 “스물네 시간 백치에 가까울 정도로 한 가지 생각만 할 것이다. 문장들, 더 많은 문장들"에 압축적이고 절절하게 마음을 담아내기 위해 몰두할 것이다...그러니까 사랑 말이다.” 소설을 읽을 때의 마음도 비슷하다. 주인공과 그의 상황에 몰입되어 가슴 저릿하고 긴박했던 순간들. 누굴 사랑하게 된 순간을 떠올려 보라. '맘에 든다, 좋다' 말고, 사랑하게 된 순간 말이다. 

핍진성은 소설의 인물과 상황에 대해 가능한 많은 정보를, 구체적으로 표현해 내는 작업으로 ‘개연성’과 ‘생명’을 부여하는 작업이다. 그걸 머리로만 쓰려고 하면 답이 안 나온다. ‘감정이입’, 정말 스스로 그가 되어 보지 않고서는 감각할 수 없는 것들을 글로 펴 낼 수 있다면 핍진성을 확보한 것이다. 그리고 그걸 ‘너저분한 단어 들을 뚫고(75p) 좀 더 쓸만한 단어들로 표현하는 것이다. 종이인물(131p)을 떠올려 보면 쉽다. 내가 설정한 캐릭터는 종이라 치자. 문학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고 진부한 말을 입에 담았다가는 단숨에 타버리고 말, 가냘프고 예민한 속성의 기름종이. 

어찌하다 보니 세 가지를 숨차게 다 이야기했다만, 김연수가 정말 말하고 싶은 건, "재능이라는 소설기계는 소설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을 쓰지 않기 위한 방법 중에서 재능에 대해 말하는 것 보다 더 효과적이고도 죄책감이 없는 방법은 없으니까(23p). 어디나 적용할 수 있을 법한 문구 아닌가. 재능을 탓하며 하지 않았던 수많은 일들. 공부, 연애, 효도, 운동... 수없이 많다. 그러니 닥치고 쓰자. Just Write! 그러다 보면 한 순간 작가가 된단다. 

그런데 도대체 뭘 써야 하는 건가? 소설 쓰기에 있어 진리에 가까운 한 가지는 사람은 저마다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은 온갖 방해물로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모두에게 하나의 이야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이라면, 어떤 세계에 살고 있을 것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더 자세하게, 문장에는 연애편지를 쓰듯 한땀한땀 의미를 부여해서. 내 사랑하는 가냘픈 종이인형이 타버리지 않게 조심조심. "그러니까 사랑 말이다.” 
 
 
책제목 소설가의 일┃저자 김연수┃출판사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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