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에 박지영에서 박재아로 이름을 바꿨다. 과거에는 특별한 경우에만 개명을 허가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개명할 엄두를 못냈다. 방귀녀, 피바다, 변태랑, 동싸계, 지애미 등의 믿기 힘든 이름을 실제로 가진 사람은 평생 얼마나 괴로움에 시달렸겠는가. 최근 들어 개명 허가율이 90% 이상에 달할 만큼, 법원이 개명 허가에 유연해진 이유는 자신이 원치 않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라고 강제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범죄를 저지르고 ‘신상 세탁’ 목적으로 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판결 심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름이라는 것이 나를 지칭하는 대표 명칭인데, 뭐라고 불리고 싶은지 스스로 결정할 수 없게 국가에서 막는다면 국민의 중요한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셈이다. 운명을 좌우한다는 사주와 이름 중에 사주는 바꿀 수 없으니 이름이라도 바꿔서 인생의 전환기를 만들어 보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물론 박지영이라는 이름이 혐오스럽거나 어울리지 않아서도 아니고, 부모님이 주신 선물에 대한 반항도 아니다. 순수하게 이제부터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 그래서 어떻게 불리고 싶은지 나름의 결심을 담아 내린 결정이었다. 새해에는 어떻게 살겠노라 마음먹는 소극적인 결심도 있지만, 가끔은 이런 큰 결심이 필요할 때가 있다. 

올해, 마흔을 2년 앞두고 있다. 내 방 책상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는데 언젠가 읽겠지 하며 쌓아놓은 책과, 내 스타일도 아닌데 기분전환으로 샀던 핑크색, 연두색, 형광색 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2분 정도 멍 하게 그것들을 쳐다보는데 '과연 내가 죽기 전에 저 책들을, 저 옷 들을 단 한 번이라도 오롯이 누릴 수 있을까?’하는 생각들이 뜬금없이 피어올랐다. 나에겐 이미 두 아이가 있고,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고, 체력은 점점 떨어지고, 술과 수면부족으로 집중력과 기억력은 쇠락해져 간다. 아무리 열심히 한들 획기적으로 삶을 바꿀 방법이 없고, 지금과 별 다를 것 없는 시간의 틀 속에 살 게 될 텐데, 저 것들을 다 짊어지고 살 필요가 있을까 싶어 일부는 좀 내다 버렸다. 그리고 이제부터 아무 것도 운에 맡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지금까지도 흐리멍텅하게 산 건 아니지만, 앞으로는 좀 더 굵고 분명하게 살기로 결심을 했다. 별다른 심경의 변화나 계기는 없었고, 방안에 멍 하니 앉아서 단 2분 동안 내린 결론이다. 문득 시간의 흐름을 간절히 느꼈나보다.  

그래서 이름은 왜 바꿨느냐. 무슨 좋은 뜻이 들어있는 거냐. 물론 온갖 좋은 의미는 다 따다가 한약 달이 듯 푹 고아 만들었다. 일단 흔하지 않고, 밝고 경쾌해서 좋았다. 한자로는 끌어모을 재, 아름다울 아. 아름다운 것을 끌어 모으는 사람이 되는 것 이상으로 좋은 뜻이 뭐가 있겠나 싶다. 밝고 건강한 영향을 주고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동사무소, 구청 같은 관공서에서 서류 떼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내가 개명이란 걸 해서 일일이 서류를 변경하고 있다는 자체가 놀라운 사건이다. 이 자체가 나름 굵고 큰 결심이고, 그걸 행동으로 옮긴 것이니 스스로에게 박수칠만 한 일이다. 일단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잘하고 귀찮은 걸 해냈지 않았는가. 결심 뒤에는 늘 행동이 따라줘야 희망에서 현실로 완성되니까. 

행복이라는 단어는 아직도 쓸 때마다 낯간지럽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아름다운 단어다. 그리고 ‘추구’는 신성한 움직임, 실천이다. 사람의 모든 행동은 결국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활동이 아닌가. 더 나아지고 더 좋아지고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기위해 우리는 먹고 즐기고 웃고 누군가를 만나고 일을 한다. 그러니 행복이 저 먼데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이미 온 몸으로 매 순간 추구하고 있다. 나는 그저 그 것을 좀 더 예민하게 느끼고 의도하고 계획하며 살고 싶어졌다. 그 결심을 가시화하기 위해 이름부터 바꾸기로 했다. 내가 누구냐는 정의를 다시 내리고 싶었던 거다. 말린다고 안 할 사람도 아니고, 어떤 이름으로 바꿀 지에 대해서 나 외에 간섭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부모님이나 남편에게는 미리 알리지 않고 주민등록증이 나온 후에야 이야기를 했다. 이제부터 당신 마누라는 박재아고, 아버지 딸은 박재아라고. 잘 부탁드린다며 통보했다. 

이름을 바꾸고 어떤 변화가 있느냐고 묻는다. 직업과 몸과 얼굴이(살이 좀 빠져서) 달라진 것 외에도 굉장히 단순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앞으로 내가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은 아름다운 것을 끌어 모으고 나눠주고, 나와 그들의 행복을 생산하는 데만 쓰일 테니. 사는 게 무척 복잡한 것 같지만, 의외로 단순하게 사는 방법도 있더라. 세상은 사주처럼 변할 수 없지만, 내 생각은 이름처럼 마음만 먹으면 바꿀 수 있으니 말이다. 
 
박재아
사모아 관광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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