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고 이치에いちご いちえ
인생에 단 한번 밖에 없는 소중한 인연을 뜻하는 일본어다. 지난 37년의 기록을 열심히 뒤적여 봤다. 한 사람이 떠오른다. 미래에 또 다른 이치고 이치에를 만날 수도 있지만, 그 사람에게는 내가 이치고 이치에가 아닐 수도 있고, 한 때 그와 보낸 시간은 지금도 나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정의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냉정과 열정사이'(이하 냉.열)의 주인공 쥰세이처럼 잘 생겼지만, 아오이처럼 차분하고 침착했고, 반면 나는 쥰세이처럼 쉽게 흥분하고 가라앉고 늘 충동적이고 뜨거웠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시간을 구분한다면 나는 늘 현재를 희생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왔다. 과거 역시 현재를 위한 시간이었고, 미래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굳이 되새김질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동창회 같은 모임에서 ‘한 때’를 떠올리며 집단적으로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일은 시간낭비라고 여겼다. 과거가 과거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추억 이상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냉.열의 배경이 된 피렌체는 시간이 정지된 도시다. “자아, 이 거리를 잘 봐. 이 곳은 과거로 역행하는 거리야. 근대적인 고층 빌딩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어. 이곳은 중세 시대부터 시간이 멈춰버린 거리야. 역사를 지키기 위해 미래를 희생한 거리”(pp.50) 그러나 아오이와 쥰세이의 미래를 이어 줄 수 있는 유일한 끈은 아이러니 하게도 과거의 도시, 피렌체다. 

쥰세이는 이 과거의 도시에서 빛 바랜 미술품을 복원하면서 1,000년 후를 기약하고, 두오모를 볼 때마다 그녀를 떠올리며, 그녀의 서른 살 생일에 만나기로 한 약속을 기억한다. ‘복원'이란 행위를 통해 쥰세이의 과거는 미래로 이어진다. 

냉.열 두 작품은 모두 1인칭 시점에서 기록된 것이다. 서로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하고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두 사람은 연락할 길 없이 흐릿한 기억 속에서만 서로를 더듬어야 한다. 

나의 이치고 이치에를 그렇게 만나 사랑했고, 또 그렇게 떠나 보냈다. 감성적이고 뜨거웠던 나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그에게서 느껴지는 온도차 때문에 늘 춥고 외로웠다. 그는 말과 감정을 아꼈기 때문에 나에 대한 그의 사랑조차 늘 짐작하고 추론해야 했다. 아직도 그가 얼마나 나를 사랑했었는지, 내가 그렇게 떠나버린 것을 조금이라도 아쉬워 할 런지, 내가 이토록 뜨거웠 단 걸 알고나 있을지 확인 할 길은 없다. 내 관점으로 써내려 간 냉.열 속의 준세이는, 이미 나를 쉽게 잊었고, 추억이란 단어가 생경하리 만큼 감정이 소강된 상태일 거라고, 역시 짐작 할 뿐이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냉정했던 그를 감히 유일한 이치고 이치에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아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많이 아프고 외로웠다면서…. 그건 내가 그토록 무의미하게 여기던 바로 그 ‘과거' 때문이다. 한 때 나의 현재와 미래였던 그의 존재를 나도 모르게 쥰세이처럼 복원하고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와의 과거는 추억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의 존재가 나의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도 없으며 10년 후 재회를 기대할 만한 우리의 ‘두오모’도 약속해 둔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존재와 함께 한 시간들은, 아팠던 과거의 나를 어루만지고  치료해 주었고, 현재는 미래를 위한 희생량이 아니라 다시 오지않을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순간순간들의 합이었다.  또 그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미래를 늘 현재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이 소설의 끝을 맺으며, 왜 진작 그에게 미래의 두오모를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들었다. 내가 조금만 아오이처럼 또렷하고 침착했더라면… 절대로 헤어지지 못할 거란 현재의 확신 만으로 미래를 쉽게 짐작해 버린 것이다. “모르잖니, 미래 일은. 그러니까 오늘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약속해줘. 오늘의 이 마음을 언제까지고 간직하고 싶으니까 약속하는 거야. 내 서른 살 생일날. 쿠폴라에서 기다려 주는거야” (pp.99). 그래, 미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나는 이렇게 그때도 지금도 늘 과거를 떠올리며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 과거가 추억 이상의 의미가 되기를 바라며.
 
박재아
사모아관광청 한국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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