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현<br>에어비앤비 정책 총괄
이상현
에어비앤비 정책 총괄

 

미국에서 보낸 시간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어지면서 이제는 한국에서의 생활이 더 익숙해졌지만, 막상 여행지나 맛집 추천 부탁을 받으면 그때부터 큰 고민이 시작된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데다, 우리나라는 할 것도 갈 곳도 맛볼 것도 너무 많은 곳이니까. 특히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 추천을 부탁할 때는 더 난감해진다. 여행을 통해 경험의 넓이와 깊이를 쌓은 이들을 감동시키기란 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며칠 전 5박6일 일정으로 서울을 찾은 직장동료이자 학교 후배인 맥스(Max Pomeranc)의 여행을 도와주는 일은 더 힘들었다. 한국에서 얼마 전 시작한 ‘공유숙박 관련 제도 도입을 위한 서명 운동’을 도와주러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한국까지 출장 온 그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맛보일 것인가. 


뉴욕에 살고 있는 맥스는 삶 자체가 여행인 친구다. 3살부터 체스를 시작해 어린 나이에 체스 고수로 이름을 날렸고, 이를 계기로 다수의 할리우드 영화에 체스신동 아역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맥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유대인으로, 아이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였고, 부모님은 미국 이민 1세대였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맥스는 자연스럽게 사회와 세상에 관심이 많은 아이로 자랐다. 맥스는 학교 졸업 후에는 배낭여행을 하며 1년 가까이 유럽에 머물렀고, 터키에서도 수개월을 지냈으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 증조와 고조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소가 있는 유럽의 작은 마을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었다. 


비가 오면 박물관과 미술관을, 날씨가 좋으면 DMZ에 데려가거나 고궁을 보여주고, 음식은 전통 한정식과 갈비, 닭갈비를 맛보이며 감동을 안겨주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나만의 단골집 떡볶이와 팥빙수, 자장면과 감자탕을 맛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능하면 많이 걷고, 지하철과 자전거도 함께 타며 서울의 구석구석을 돌아보기로 했다.


맥스의 출국 전날 마지막 식사를 하며 맥스에게 물었다. 지난 5일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과 맛있는 음식이 무엇인지를. 예상은 철저히 빗나갔다. 맥스가 꼽은 한국의 특별한 3가지(Top three favorites)는 골목길과 구두 가게 그리고 감자탕이었다. 내가 작정하고 계획한 DMZ, 고궁, 한정식, 갈비가 아니었다. 


“지난 금요일 저녁 동대문디자인 플라자에서 숙소가 있는 명동까지 새벽 1시에 걸어왔어. 그러면서 골목길 사이사이를 돌아봤는데, 너무 근사했어. 생각해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은, 적어도 내가 여행한 수많은 도시와 국가 어디에서도 새벽 1시에 도시의 골목길을 거닐며 안전하다고 느낄 수 없었어.” 


맥스의 눈에는 늦은 시각 청계천에서 데이트하는 이들이 낭만적으로 보였고, 좁은 골목길에서 만난 오래된 집과 빌딩, 이국적인 간판을 보는 것이 새로운 즐거움이자 발견이었던 것이다. 구두 가게도 마찬가지였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수공예 구두 가게를 발견하고 들어갔는데, 그의 발 사이즈를 잰 후 그림을 그리면서 그의 취향을 파악하려고 애쓰는 장인에게서 예술가의 혼을 느꼈다고 했다. 시장에서 감자탕을 먹으면서는 비빔밥 속 고추장의 매운맛과는 다른 특이하고 평생 생각날 것 같은 매운맛을 맛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음에 또 오면 다시 한 번 스크린 야구장에서 내기 야구를 하고 동네 목욕탕에서 사우나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너무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행 트렌드를 파악하려면 사회, 경제, 정치, 환경, 기술의 변화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개인 여행자의 취향과 주요 이슈를 미시적인 수준에서 분석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또한, 국내외 문헌과 논문을 검토하고,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델파이 조사와 심층토론, 연구 자문 등을 수행하며 트렌드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현장에서 정답을 찾을 확률이 더 높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높이 나는 새는 멀리 볼 수 있지만, 낮게 나는 새는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볼 수 있다. 


빅데이터 세상에서 패턴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무슨 쓸모가 있을까?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여행이 무엇인지를,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한 여행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맥스에게 고맙고, 아름답고 맛있는 서울이 고맙다. 이제 곧 연말이고 새해가 온다. 2019년 트렌드를 전망하기에 앞서 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부터 관찰해야겠다.

 

이상현
​​​​​​​에어비앤비 정책 총괄 대표 / 한양대학교 국제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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