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예고도 없이 세상이 멈췄지만, 다시 세상은 조금씩 힘을 내며 흘러가고 있다. 지금 여기 홍콩은 조금 덜 붐비고 차분하지만, 차츰 예전의 활기와 일상이 돌아오고 있다. 나는 홍콩 미드레벨에서 살고 있는 8년차 ‘미드레벨러’다. 운동화를 신고 신발끈을 꽉 조이며 하루를 시작한다.

여행은 잠시 멈췄지만, 홍콩의 시간은 여전히 빠르게 흐르고 있다
여행은 잠시 멈췄지만, 홍콩의 시간은 여전히 빠르게 흐르고 있다

▶미드레벨과 사랑에 빠지기까지

 

오래전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홍콩으로 이사를 결정하고, 현지 부동산 직원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의 이름은 ‘메이(아직도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니 신기하지만)’였다. 그녀는 내가 살 만한 집들의 추천 리스트를 메일로 보내 줬다. 수많은 리스트 항목 중 유난히 나를 설레게 한 단어, ‘미드레벨(MidLevels)’. 어린 시절 홍콩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을 동경하기도, 또 직장의 출장지로도, 또 친구들과 여행으로 홍콩을 오가면서 읽었던 책에서도 수없이 접했던 미드레벨은 ‘홍콩’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동경의 대상지였다.

 

산 중턱에 빽빽하게 들어선 높은 빌딩 아파트, 왠지 풋풋한 사랑의 감정이 떠오르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오밀조밀 모여 있는 소호(Soho)의 레스토랑까지. 상상만으로도 절로 웃음이 지어지지만, 뉴욕의 센트럴 파크,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처럼 그저 선명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런 ‘미드레벨’에서 살아 볼 수 있다니. 마치 어느 홍콩 감독의 영화에 출연 캐스팅 제의를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메이의 메일에 회신을 했다. “하우징 투어(Housing Tour)는 미드레벨부터 시작하겠어!” 그렇게 나는 홍콩의 심장부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미드레벨에 사는 사람, 일명 미드레벨러(Mid-Leveler)가 된 것이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미드레벨에 대한 사랑은 변치 않았다. 변한 것이라면 미드레벨러보다는 미드레벨러버(Midlevels-Lover)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 사랑하는 대상과 아무런 밀당 없이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일, 흔치 않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총 20개의 에스컬레이터와 3개의 무빙워크로 이루어져 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총 20개의 에스컬레이터와 3개의 무빙워크로 이루어져 있다

▶하이힐에서 운동화까지의 시간

 

미드레벨에서 살게 된 후 내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신발이다. 신발장 중앙을 항상 차지했던 하이힐은 점차 구석으로 밀렸다. 손 닿기 편한 곳에 차곡차곡 새 운동화들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뒤로는 빅토리아 피크(Victoria Peak)산이, 아래로 센트럴(Central)이 내려다보이는 미드레벨 지역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은 버스도 택시도 아닌 에스컬레이터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터득한 지혜다. 바퀴 달린 것들은 모두 다산 주변을 빙빙 돌아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러니까 미드레벨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의 두 다리뿐이다. 약속에 늦었다면 편한 운동화를, 회사에 늦었다면 좀 더 편한 운동화를 찾아야 한다. 진정한 홍콩 라이프는 하이힐에서 운동화로 바뀌어 가는 시간을 거쳐야만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 시간 속에서 매일 어느 골목 어귀를 거닐며 홍콩을 천천히 음미해야 한다. 곧 여유를 찾고 진정한 홍콩의 삶을 누릴 수 있다.

필 스트리트의 명소이자 커피와 베이커리로 유명한 ‘파인프린트(Fineprint)’. 사워도우 빵과 블랙커피가 인기다
필 스트리트의 명소이자 커피와 베이커리로 유명한 ‘파인프린트(Fineprint)’. 사워도우 빵과 블랙커피가 인기다
홍콩 거리에는 벽화가 가득하다. 덕분에 그저 골목을 걷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홍콩 거리에는 벽화가 가득하다. 덕분에 그저 골목을 걷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길치의 고백

 

센트럴과 셩완(Sheung Wan)을 아우르는 올드타운 센트럴(Old Town Central). 이곳에 살면서 가장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오밀조밀하다는 것. 세심하고 꼼꼼하게 연결돼 있어 하루종일 걸어도 지루하지가 않다. 한적한 주택가인 올드 피크 로드(Old Peak Road)와 로빈슨 로드(Robinson Road)에서 한 블록 걸어 내려오면 전 세계 레스토랑이 줄지어 있는 소호(Soho)가 나온다. 활기찬 소호 거리에서 또 한 블록 내려오면 헤리티지 건물이 웅장하게 서 있는 할리우드 로드(Hollywood Road)가 기다린다.

 

또다시 한 블록 내려오면 쇼핑의 중심지이자 금융가로 이어지는 퀸스 로드 센트럴(Queen’s Road Central)에 이르게 되는 식이다. 상상해 보자. 멋진 사람 옆에 예쁜 사람 옆에 퇴폐적인 사람이 있다면, 어찌 눈이 즐겁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것이 홍콩이 매력이다.

올드타운 센트럴, 어느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올드타운 센트럴, 어느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중국의 전통 공연인 변검을 본 적이 있다. 변검은 공연자의 감정 변화와 독특한 개성을 얼굴에 나타내며 순식간에 가면을 변화시키는 분장쇼다. 문득 변검과 올드타운 센트럴이 참  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르고 다양하다. 그래서 흥미롭고, 보면 볼수록 재미가 고조된다.  론 처음에는 오밀조밀한 홍콩을 온전하게 즐기지 못했다.


서울의 탁 트인 평지와 반듯한 네모에 익숙한 나는 미드레벨의 가파른 지형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고, 계단과 언덕을 오르내리며 숨차지 않을 만큼의 체력이 필요했다. 몇 년 동안 걷고 또 걷고, 언덕을 오르고 내리면서 어느 순간 숨이 덜 차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모든 행복은 체력이 바탕이다. 지금은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주위 모든 가게 이름을 애쓰지 않아도 다 외울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심각한 길치다. 

홍콩의 트램 시스템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2층 전차로 운행된다
홍콩의 트램 시스템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2층 전차로 운행된다

▶오밀조밀, 여전히 흐른다

 

미드레벨의 매력 중 가장 매혹적인 것은 소호와 올드타운 센트럴 주변의 레스토랑이다. 집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오면 세련된 가게가 이어졌고, 각국의 요리를 그날의 기분에 따라 마음껏 고를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한동안은 홍콩의 전통 브런치인 ‘차찬텡(Cha Chaan Teng)’에 빠져서 유명 밀크티와 파인애플번 가게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남들은 시간 내어 일부러 찾아오는 유명 레스토랑을 가까이에 두고 있어 편리했고 또 그게 미드레벨러의 즐거움이기도 했다.

 

살다 보니 관심사도 바뀌고 다양해져서, 어떤 때는 센트럴 주변 아트 갤러리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할리우드 로드의 앤티크 숍을 구경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올드타운 센트럴의 헤리티지 건물을 찾아다니며 공부하기도 했는데, 그 덕분에 올드타운 센트럴의 과거를 알게 됐다고 해야 하나. 친밀감의 기초는 이해다. 우리가 역사를 반드시 배워야 하는 이유겠다. 최근에는 커피에 눈을 떴다. 라떼만 즐기던 내가 블랙커피만 마시게 된 이유는 역시 올드타운 센트럴에 수없이 생기는 트렌디한 커피숍의 영향이 크다. 

Life goes gn like this again, 아름다운 홍콩의 시간은 여전히, 앞으로도 흐를 것이다
Life goes gn like this again, 아름다운 홍콩의 시간은 여전히, 앞으로도 흐를 것이다

블루보틀 커피(Blue Bottle Coffee)과 아라비카(Arabica) 등 글로벌 체인부터 나인티스(Ninetys), 파인프린트(Fineprint) 같은 로컬 커피 하우스를 돌아다니며 블랙커피의 미묘한 차이를 즐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미드레벨 생활 8년이라는 시간이 아직 지루하지 않은 걸 보면 그만큼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오밀조밀’의 한자를 풀어 보면 ‘빽빽하고 많으며 깊고 따뜻하다’라는 뜻이 나온다.

 

빌딩도 가게도 사람도 빽빽하고 많지만, 미드레벨에 대한 나의 애정이 점점 더 깊고 따뜻하게 변하는 것을 보니, 이보다 더 정확하게 미드레벨을 대신할 수 있는 단어는 없을 것 같다.시간과 공간이 멈춘 듯한 세상이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올드타운 센트럴은 예전보다 조금 덜 붐비고, 차분해진 분위기지만 이곳의 생활은 조금씩 옛날의 활기를 찾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철저하게 자신과 타인을 보호하며 이 시기를 잘 견뎌 내고 있다. 그래서 기대한다. 옛날의 일상이 ‘숲속의 메아리처럼, 파란 하늘의 화살처럼’ 곧 돌아올 것을. 운동화를 신고 신발 끈을 꽉 조이며 미드레벨의 하루를 시작한다. 홍콩의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

 

글 김윤선 사진 Rory Chu Tin Hang, 트래비DB 에디터 강화송 기자

저작권자 © 여행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