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도 출렁다리를 배경으로 산책하는 연인
가우도 출렁다리를 배경으로 산책하는 연인

 

농촌에서의 하룻밤과 
시골밥상에만 끌리다니
오산이었다. 
여행도 푸짐할수록 좋으니.

마량항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마량항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말도 쉬어간다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낯설었다. 다섯 시간이 넘는 이동시간을 보고서야 짐작했다. 땅끝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강진은 땅끝마을로 유명한 해남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남쪽 끝으로 향한다는 건 꼬르륵 보채는 위장의 결의를 다져야 하는 일이다. 일찍이 집을 나서 주먹밥으로 배를 채우고 버스에 올랐다.


해가 중천에 뜰 때쯤 눈앞에 바다가 펼쳐졌다. 해안 도로를 따라 청보리가 가득하고, 사계절의 초입에는 만개한 유채꽃이 봄을 알린다 하니 드라이브 코스로도 제격.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마량항이었다.

마량항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마량항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조선시대 제주마들이 육지에 내려 처음으로 먹이를 먹었던 곳이라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좀 더 거슬러 고려시대에는 강진만에서 만든 고려청자를 개성까지 나르는 시작점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서남부 최남단에서 육로로 바다를 잇는 곳. 시대를 거듭하며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 배가 고프다. 일단은 내려야겠다. 해물칼국수를 비롯해 각종 신선한 재료로 만든 맛집이 바다를 마주하고 있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전망대로 향했다. 가는 길에는 좌우로 수산시장이 들어섰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마량놀토수산시장은 수입산, 바가지, 비브리오(세균의 한 종류)가 없는 3무 시장이라고. 갓 잡아올린 싱싱한 해산물이 손님들을 기다린다. 

 

왕실의 화려한 병풍에서부터 여염집 벽장문까지, 선조들은 그림을 그려 생활공간을 두루 장식했다. 민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문화를 품고 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한국민화뮤지엄이었다. 무려 4,500점의 민화를 보유하고 있으며, 전문 해설가의 흥미로운 이야기도 곁들일 수 있다. 19세 미만은 출입 금지. 2층에는 범상치 않은 전시관이 존재한다. 한중일 삼국의 춘화를 만날 수 있는 춘화방이다. 얼마나 낯 뜨거울까 했더니, 남사스럽기까지 하다. 구멍 난 창호지 사이로 남녀의 정사를 훔쳐보다 1층으로 향했다. 목함, 문패, 부채 등을 나만의 색으로 입혀본다.

가우도 출렁다리
가우도 출렁다리

 

●밥상의 다른 말은 인심


강진군은 바지 모양을 닮았다. 길게 뻗은 강진만이 육지를 파고드는 모양새 같기도 하다. 가우도는 대구면과 도암면으로 양팔을 뻗고 자리 잡았다. 대구면 출렁다리 입구에는 플라스틱 쓰레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물고기 조형물이 있었다. “환경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쓰레기는 두고 가세요” 두 손 가볍게 산책에 나선다. 마침 하늘이 맑고 산이 푸르다. 여유롭게 산책하기 좋은 날씨다.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2.5km 생태탐방로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편안한 나무데크와 머리 위로 우거진 초록 초록한 나무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걷기 좋은 가우도 트레킹 길
걷기 좋은 가우도 트레킹 길

어느덧 반대쪽 도암면과 연결되는 출렁다리에 이르렀다. 가오리를 닮은 귀여운 완두빵으로 허기를 달래다 고개를 들어본다. 삐죽 솟아오른 거대한 고려청자의 정체는 바로 짚트랙 출발지. 가우도 정상에서 대구면 해안을 단 1분 만에 잇는다. 조금 두렵다면 수상보트는 어떨까. 힘차게 바다를 가르며 강진만 한 바퀴를 두르고 오는 기분은 짜릿하다. 시원하다. 유쾌하다. 

오직 단 하나 때문에 강진이 기대됐다면 누군가는 다소 섭섭할 수도 있겠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FU-SO체험이다. FU-SO란 필링 업(Feeling Up), 스트레스 오프(Stress Off)의 줄임말로 농촌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강진만의 여행 프로그램이다. 강진종합운동장에 옹기종기 모인 승합차에서 시골에서의 하룻밤을 안내할 길잡이들이 환한 웃음으로 맞이했다.

푸소체험 시골 밥상
푸소체험 시골 밥상

 

강진 시내에서 20여 분을 달려 월출산이 품은 마을 성전면에 도착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봐도 온통 산이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먼저 시내 마트나 편의점에 다녀와야 한다더니 넓게 펼쳐진 밭 사이로 드문드문 인가가 자리 잡은 조용한 마을이었다. 옆방에 머무는 이들과 평상에 마주 앉아 시골 밥상을 맞이했다. 야무지게 무친 신선한 나물, 넉넉하게 구운 조기, 직접 만든 따끈따끈한 손두부, 지글지글 익어가는 삼겹살까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정한 인심은 밥상에서 느낄 수 있는 법. 한 입 먹을 때마다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백련사로 올라가는 길
백련사로 올라가는 길

●오늘은 복도 많지


뜨끈한 순두부로 아침을 시작했다. 많은 걸음이 기다리고 있는 하루다. 부지런히 서둘러 무성한 동백숲을 만났다면 잘 찾아왔다는 증거다. 환영사를 건네는 듯 걸음마다 동백꽃이 흩뿌려졌다. “동백철일 때 왔으면 너무 예뻤겠다” 앞서가는 이들에게서 아쉬움이 흘러나왔다. 한 철 늦으면 뭐 어때. 먼저 땅에 발을 디딘 동백꽃을 따라갈 수 있는데. 매끈한 나뭇잎이 우거진 숲을 십여 분간 걸었다.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픈 욕구가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대신 온몸으로 자연을 느껴본다. 한낮에도 어둑어둑한 터널 속 햇살 한 줌이 모자이크처럼 몸에 내려앉았다. 여행 중에는 행운을 곱씹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백련사 만경루에서 강진만을 훤히 내려다보는 지금 이 순간. 푸른 산과 강진만이 창이라는 액자 속에 담긴다. 날씨가 궂으면 희미하고 아득했을 터인데 저 멀리 굽이굽이 능선이 훤히 보였다. 한 폭의 수묵화를 감상하다 발치로 시선을 가져왔다. 부처님을 기다리는 연등이 알록달록 사찰을 밝힌다. 복도 많지. 한 번 더 행운을 곱씹는다. 

사의재 저잣거리
사의재 저잣거리

●다산이 머문 자리에


다산 정약용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은 호젓하다. 서너 조각의 빛이 겨우 들만큼 무성한 숲길을 지나다가도 강진만이 발아래 펼쳐진다. 한량처럼 여유롭게 걷다가도 허리에 손을 얹고 오르막길을 오르게 된다. 30분의 산행 끝에 다산초당에 도착했다. 만덕산 기슭에 소박하니 자리한 집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10여 년간 이곳에 머무르며 목민심서를 저술하고, 실학을 연구했다고. 마루에 걸터앉아 새소리를 들으며 절친한 벗인 혜장선사와 다산의 대화를 그려보았다.

 

산 아래 다산박물관을 지나 사의재로 향한다. 강진에 유배된 정약용이 맨 처음 머물던 주막집으로, 주인의 배려로 4년 동안 기거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맑은 생각,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 네 가지를 마땅히 할 것. 이름부터 다산의 생각이 묻어났다. 그 시절 저잣거리를 재현한 골목에는 공연장과 카페가 들어서 있고, 강진군민들이 직접 만들고 출연하는 공연 관람도 가능하다. 

약 10만평에 달하는 설록 강진다원
약 10만평에 달하는 설록 강진다원

●정원과 다원 사이


풍류는 선비의 도리다. 강진은 자연과 차를 즐겼던 우리 조상들의 멋을 간직하고 있다. 백운동원림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교류하던 정원이다. 높게 뻗은 대나무와 우거진 동백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오솔길 숲을 지나면 정원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직접 걸어보니 알 수 있었다. 세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를. 비밀스레 숨은 자태에 신비함은 배가 된다.

화사하게 핀 꽃과 연못이 기와집과 어우러지고, 자연과 인간이 스며들어 하나가 된다. 놀랍게도 숲 속 비밀정원이 모습을 찾은 건 불과 10여 년 전이다. 2006년부터 시작된 복원에는 다산 정약용의 ‘백운첩’과 초의선사의 ‘백운동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산 정약용은 백운동원림에서 하룻밤 머무른 뒤 그 경치에 반하게 된다. 아름다운 풍경을 그저 눈으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을 터. 다산 선생은 백운동의 12가지 풍경을 골라 시를 지어 백운첩을 남기고, 제자 초의에게는 백운동도를 그리게 했다. 상세한 묘사 덕에 백운동원림은 4년 만에 성공적으로 복원을 마쳤다.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백운동원림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백운동원림

월출산 절경이 병풍처럼 둘러진 곳, 설록 강진다원이다. 약 10만평(33만㎡) 규모로, 백운동원림과 바로 이어져 있다. 흔히 녹차밭 하면 보성과 제주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강진다원은 설록차로 유명한 (주)태평양이 가지고 있는 차 재배지 중에 가장 오래된 곳이다. 예로부터 사찰을 중심으로 차나무가 재배돼왔고, 정약용을 비롯한 선비들이 차를 만들었던 기록도 남아 있으니 우리나라 차문화의 산실이라 해도 무방하다. 늦은 봄 돋아난 싹 위로 서리 방지용 팬이 돌아가며 독특한 절경을 자랑한다. 잘 알려지지 않아 아는 이들만 알음알음 찾는 숨은 명소다.

강진 전통 시장
강진 전통 시장

●강진의 멋과 맛


본디 흥과 멋과 맛은 하나라. 먹거리장터, 한정식체험관, 음악창작소가 한자리에 모였다. 강진 오감통은 음악과 음식을 모두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음악창작소는 지역 뮤지션의 창작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지역민의 여가생활에 이바지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코로나19만 아니었더라도 활기를 띠었을 넓은 야외무대가 적적하게 느껴졌다.

강진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한정식으로 정했다. 산과 바다를 모두 아우르는 천혜의 환경을 간직하고 있으니 먹거리도 신선할 수밖에. 신선한 농산물과 해산물이 조화로운 한정식은 강진의 자랑이다. 특히 먹거리장터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즐겨 먹었던 식단을 재현한 ‘대통령밥상’을 만나볼 수도 있다.

맞은편에는 로컬푸드 매장이 들어섰다. 반경 50km 이내에서 생산된 지역 농산물을 판매하는 곳이다. 유통 과정을 대폭 줄여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익. 파 한 단에 1,500원, 딸기 한 박스에 3,000원. 듣도 보도 못한 가격에 눈이 돌아간다. 눈도 배도 손도 이토록 든든하니 선물 같은 하루다. 

 

*기자가 체험한 우수여행상품  
여행공방 [강진 푸소체험 & 시티투어 [1박2일]]

 

강진 글·사진=이은지 기자 even@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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