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서 만난 또 다른 이국 ‘로카르노’
모든 것이 새롭고 신선한 여행에도 유효기간은 있는가 보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생경함이
아닌 익숙함이 몸 속 이곳 저곳에 똬리를 틀어 자칫 여행의 참맛을 놓쳐버리기 일쑤다. 변
화를 찾아 나선 여행이라 해도 역시 변화는 필요한 법이다. 스위스 속 로카르노처럼...

스위스 속 작은 이탈리아
어릴 적 동화책에서 혹은 달력 속의 흔해빠진 사진에서 거의 쇠뇌 당하다시피 눈에 익힌 스
위스의 새파란 초원과 그 위에 하얀 점으로 박혀있는 양떼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알프
스 산맥의 하얀 잔설. 기막힌 경치요, 연신 카메라 셔터 눌리는 장관이다.
그러나 처음 대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스멀스멀 찾아오는 일상성과 평범함은 어찌 해석해야
할까. 너무 쉽게 적응된 탓인지 더 이상 처음의 그 느낌, 그 설렘, 그 놀램, 그 신선함을 찾
을 수 없다. 오감이 매너리즘에 빠졌다.
이럴 땐 내집같이 느긋하고 편안하면서도 동시에 색다른 감흥 또한 선사하는 무언가 독특한
곳이 필요하다. 일거에 분위기를 갈아치울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스위스의 제주도! 바로
로카르노 같은 곳 말이다.

야자수와 백설의 공존
영화제의 도시 로카르노는 스위스의 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이탈리아어권에 속한다. 독어, 이
태리어, 불어, 로만어의 4개국어를 사용하는 다언어 국가인 스위스는 독일어권이 약 75%를
차지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이탈리아어권은 그리 넓지 않다. 대신에 남쪽의 티치노 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어 사용지역은 이탈리아와의 접경 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인지
이국적 정취가 물씬 풍긴다. 현지인들도 첫 만남에선 어느 언어로 대화를 할 지 먼저 합의
를 봐야 할 정도의 다양성으로 가득하고 그만큼 생기가 돈다. 또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서 연중 따뜻하고 포근하다. 게다가 겨울까지 짧고 온화하다. 쭉쭉 뻗은 파란 이파리를
한껏 뽐내는 야자수와 백설이 공존한다.
단연 티치노 지방의 중심이라 일컬을 수 있는 로카르노는 해질 무렵의 붉은 노을을 닮은 한
없이 아늑하고 평화로운 색채를 띈다. 아침에 눈떠 처음 맡는 은은한 커피향처럼 따사롭고
내면 깊숙이 잠들어 있던 태고의 감성을 일깨우는 향기를 지녔다. 그 맛은 마치 갓 따온 신
선한 딸기 한 알처럼 상큼해 자꾸만 생각이 가고 감칠맛이 돈다. 엄마 품 속에 살포시 안겨
새근새근 잠든 아기의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곳곳 남유럽풍 정취 물씬
지친 여정의 피로도, 시나브로 익숙해져 버린 생경함도 이곳 로카르노에선 한꺼번에 날려
버릴 수 있다. 제주도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처럼 로카르노도 전형적인 스위스
이외의 모습을 안고 있다. 과연 이곳이 스위스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스위스 속의 또 다른
스위스라고나 할까. 이탈리아와 접해 있어 스위스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이탈리아도 아니다.
스위스 속의 이탈리아, 이탈리아 속의 스위스, 제3의 도시다.
이탈리아와의 국경에 길다랗게 걸쳐있는 마조레 호수변에 어깨를 맞대며 죽 늘어서 있는 흰
색 벽 오렌지색 지붕을 한 남유럽풍의 집들에 시야가 확 트인다. 또 호주 주변에 서 있는
많은 이름 모를 열대식물과 감귤 계통의 나무들 그리고 가지각색의 미소로 여행객들을 맞는
튤립과 아열대의 꽃들이 남국 분위기를 더한다. 맑은 호수와 저편 맞은편에 보이는 산꼭대
기의 잔설들 그리고 열대수와 꽃들이 이뤄내는 묘한 조화에 이곳을 주저없이 ‘스위스판 제
주도’라 칭할 수 있다.

평화로움 그 자체인 도시
여러 종류의 휴식 중 이곳에서의 휴식은 따사로운 햇살과 한없이 평화로운 분위기에 취하는
달콤한 휴식이다. 관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휴식이 된다. 왜 이곳을 ‘평화의 도시’라
부르는지 금새 공감할 수 있는 휴식이다.
건물들은 또 어떤가. 도시 안쪽으로 조금만 발을 들여놓으면 눈과 꽃의 공존처럼 전통과 현
대가 공존하고 있음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오밀조밀 들어선 건물들은 제각각의 맛과 향
기를 갖고 있다. 전형적인 고딕양식을 취한 중세풍의 건물이 남아 있는가 하면 위용을 자랑
하며 우뚝 솟아있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현대식 건물도 도시 한 곳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
다. 이곳의 산악지대에서 채취한 납작하면서도 동글동글한 자갈로 뒤덮인 거리 바닥을 걷는
재미도 무시할 수 없다. 걷는 게 버거워지면 아기자기한 장식으로 한껏 멋을 낸 관광열차에
몸을 맡기고 콧등을 스치는 선선한 미풍과 봄날의 따사로운 햇볕 같은 도시 로카르노의 구
석구석을 알차게 관람할 수도 있다.
철도시스템이 특히 발달해 있는 스위스는 총 5,000여km에 이르는 철도망도 감탄을 자아내
지만 가파른 산악지역에 맞춘 톱니레일 등산열차 등 독특한 운행방식도 눈길을 끈다. 톱니
레일과 함께 스위스를 대표하는 열차가 있다면 단연 퓨니콜러(Funicolar)를 들 수 있다. 이
는 로프를 이용해 산 정상 등을 오르내리는 열차인데, 로카르노 역 옆에서 출발하는 ‘퓨니
콜러’를 이용해 ‘마돈나 델 사소(Madonna del Sasso)’에 오르면 로카르노가 한눈에 들
어오는 탁 트인 경관이 펼쳐진다. 로프에 의지해 아슬아슬 산을 오르는 퓨니콜러 타는 재미
도 쏠쏠하고, 중세풍 성당인 마돈나 델 사소에서는 시원한 경관과 함께 성서 속 내용을 꾸
며 놓은 내부시설도 볼 만하다. 또 멋진 사진촬영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취재협조
동신항운 02-756-7560 스위스항공 02-757-8242

세계적 영화축제 그 중심에선 그란데 광장
로카르노의 따사롭고 아늑한 풍경에 자칫 지루함으로 번질수도 있었던 여정에 다시 활기와
변화를 장전하고 찾아나선 그란데 광장(Piazza Grande). 규모와 권위 면에서 칸, 베를린, 베
니스 영화제와 함께 세계 4대 국제영화제로 꼽히는 로카르노 영화제가 열리는 곳이다.
가슴 가득 기대를 품고 맞이한 그란데 광장이 주는 첫느낌은 썰렁함, 실망감. 도무지 이곳이
세계 4대 영화제의 개최 장소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그만큼 평범하고 규모도 작다.
하지만 자갈 깔린 광장을 걸으며 그 평범성에 농도가 진해지면 진해질수록 서서히 평범성을
뚫고 비범함이 고개를 쳐든다. 비록 이렇다 할 특색 없는 광장일 뿐이지만, 매년 세계의 영
화 수작들이 한데 어우러져 영화축제라는 또 한편의 거대한 영화를 만들어내고 세계인의 이
목을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하기 때문에 더욱 비범한 것일지도 모른다. 거추장스런
장식물 하나없이 세계적인 영화축제를 잉태한 로카르노야말로 진정한 영화의 도시, 예술의
도시가 아닐까 싶다.
그란데 광장을 거쳐 조금 위쪽 언덕배기에 천년이 넘도록 자리잡고 있는 비스콘티 성
(Castello Visconti)도 로카르노의 빼놓을 수 없는 관광 명소다. 이곳 티치노 지방의 명문 귀
족이었던 비스콘티가(家)의 성으로써 지난 10세기경에 창건되었다. 비록 지금은 옛 영화와
명예의 흔적만을 겨우 남기고 있지만, 눈앞에 펼쳐진 마조레 호수와 로카르노를 묵묵히 바
라보며 천년 넘는 역사의 흐름을 증명하고 있는 모습에 숙연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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