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땅 만주 벌판을 가다
반백년 분단의 역사가 빼앗아 간 것은 사람과 땅만이 아니다. 이미 언어도 사상도 판이하게
달라진 상황에서 한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밝혀 줄 역사의 절반도 빼앗겨 버렸다. 북한 땅을
거쳐가면 반나절에 도착할 그 곳,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지배했던 고구려의 유적을
찾아 비행기를 타고, 배를 타고 또 기차에서 밤을 보내며 힘겹게 찾아갔다.

고구려 역사탐방 및 백두산 상품은 단순관광차원의 여행이 아니라 잊혀진 민족의 땅과 역사
를 되찾는 순례의 길이다. 5박6일 일정 중 삼일밤은 기차에서 자야하고 버스 이동거리도 길
지만 만주벌판에서 느끼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생각하면 그런 불편은 오히려 즐겁다. 일정
중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얘기를 많이 듣게 되는데, 아직 인프라가 부족한 중국
의 상황에서는 더 좋은 교통편이나 숙식이 없다는 뜻이고, 실제로 그렇다.
첫날 비행기로 심양에 도착하면 본계수동과 북릉공원, 요녕성박물관, 서탑거리 등을 구경하
고, 저녁에 침대칸 기차로 밤새 8시간을 달려 고구려 유적지가 있는 통화지방으로 향한다.
그 뒤 이틀 동안 이 상품의 하일라이트인 집안지역에서 5회분5호묘, 장군총, 동구고묘군 등
고구려 시대의 무수한 고분과 국내성터, 환도산성 등 천연의 요새들을 집중적으로 둘러볼
수 있다. 또한 압록강유람선을 타고 강건너 북한사람들과 수인사를 나누고 북한의 만포땅을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예기치 못한 보너스다.
넷째 날에는 또 다시 8시간이나 밤기차를 탄 여독을 백두산 온천물에 풀어놓고 천지를 향한
등정길에 오른다. 아직은 눈이 녹지 않아 천지폭포까지만 올라갈 수 있지만 5월말부터는 날
씨만 좋다면 천지의 맑은 물에 발을 담가볼 수 있다.
다섯째 날에는 오전에 두만강변에서 북한으로 이어진 다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오후에 일
제시대 독립운동이 활발했던 연길의 일송정, 대성중학교, 윤동주시비, 해란강을 둘러보고 밤
에는 기차로 처음의 도착지인 심양으로 돌아와 하룻밤을 보낸 뒤 귀국하는 일정이다.
고구려 역사탐방과 백두산. 월·수·금 출발. 5박 6일 77만9,000원(성수기 84만9,000원) 북경
을 포함하는 6박7일 코스는 94만9,000원(성수기 99만9,000원). (주)골드투어 02-2269-9311


무너지는 고구려 유적들 잠못이루는 밤
사실 처음에 고구려 문화를 탐방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경주나 부여를 방문하는 것과 많이
다를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무덤이나 성터, 박물관이 있겠지, 입장료를 받을 테고, 기념사진
을 많이 찍는 것으로 보상받고 싶을 테지….
그러나, 다르다. 무엇이 다른가 하면 너무 초라한 것이 다르다. 일단 무엇이든 크게 만들고
보는 중국인들 못지않게 우리 고구려 조상들도 큼지막하게 쌓아올리고, 번성한 문화를 이루
고 했을 터인데 남아 있는 것이 자꾸 사라진다. 세계 최대니, 최초니, 그런 칭송을 받고 싶
은 것이 아니라 그저 가치 있는 것들이 후손들을 위해서 지켜지고 가꾸어지기를 바라는 최
소한의 바램조차 무색하고 오랜 세월 무심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잠시나마 조선족
동포들이나 북한동포들에게 어이없는 원망이 들만큼, 꼭 그만큼 한스러웠다. 우리가 갈 수
없었던 그 곳에, 당신들이 있었으니, 그러니 이 지경인 것은 너무하지 않냐고.
초라하다는 것은 볼 것이 없다는 것과 다른 뜻이다. 집안지역에는 1,200개나 되는 고분이 있
다. 규모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장군총의 높이는 12.4m, 사방의 길이가 31m이며 광개토대
왕비는 키가 6m가 넘는다. 뛰어난 미술적,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벽화와 유물들이 있고, 그
들이 살아 왔던 도시의 흔적도 그 자체로 반도 땅에는 없는 경이로운 풍경이다.
그러나 그 많은 무덤들은 거의가 도굴 당한 상태로 논과 밭 사이에 방치되어 있으며 이제는
800여개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심양에서 밤기차로 통화까지 도착한 뒤 버스로 3시간을 달
려 찾아간 집안지역에서 들은 얘기다. 버스에 앉기만 하면 잠들기를 서슴지 않는 여행객들
도 집안으로 길옆으로 이어지는 돌무더기와 흙더미들이 고구려 시대의 고분이라고 말하자
잠이 확 깨버렸다. 이 순간부터 고구려 유적지를 돌아보는 내내 우리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던 생각은 ‘이 곳이 우리 땅이라면 얼마나 근사하게 복원해 놓았을까, 얼마나 정성들
여 보호했을까’였다. 타국이라는 낯설음은 다른 문화와 풍경과 음식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
었다. 오히려 우리 것을 우리가 어쩌지 못한다는 좌절감은 여기 이 땅이 정말 머나먼 이국
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했다.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 고려 태조가 북진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조선 태조가 위
화도 회군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역사에 적용되지 않는 만약에를 부질없이 반복하며 이제는
먼 옛날 그들까지 원망스러워 한다.
그러나 그들을 비난할 일이 아니다.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중국
인들의 연구와 노력에 비하면 현재의 우리도 논의만 분분할 뿐, 가시적인 결실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유적 보호를 위한 모금운동이라도 하고 수학여행 필수코스로 정하고 싶지만
역시 국가간의 민감한 문제란다.
고구려의 군사 수비성이었던 환도산성터에 올라갔을 때, 조상님들은 왜 이제와 왔냐는 듯
비를 내리셨고 일행이 다시 버스를 타자 거짓말 같이 비를 거두어 가셨다. 그러나 과수원으
로 변해버린 궁궐터와 자리만 남아있는 성벽터에서 느낀 안타까움은 장군총을 보았을 때의
아픔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무너지고 있는 장군총. 1,100여개의 화강암 돌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네 면을 지탱하고 있는
12개의 호분석 중 하나가 손상됐다. 그리고 그 부분을 중심으로 장군총은 내려앉고 있었다.
북한땅에서 불과 2km, 강 건너 북한의 만포 비료공장에서 올라오는 굴뚝연기와 산위에
‘청년림’이라는 글자마저 선명한 이 지척의 땅에 광개토대왕의 묘라고도 하고, 장수왕의
묘라고도 하는 이 거대한 피라미드형 석관묘가 무너지고 있었다. 가슴도 함께 무너져 내렸
다.그러나 장군총은 광개토대왕릉에 비교하면 훌륭하다고 해야 할까? 같은 석총묘라는데 돌
들은 다 무너져 내렸고 석실이 꼭대기에 위태롭게 드러나 있다. 그 내부의 석관도 원래 돌
들이 다 무너져 아예 시멘트로 발라 놓았다.
고구려 시대 유일한 문자기록이라는 광개토대왕비도 마찬가지여서 체계적인 관리없이 너도,
나도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130여 글자들이 판독이 불가능해졌고, 비바람을 막기 위한 비
궁이 세워진 것도 몇 년 되지 않았다.
잃어버린 역사의 땅 고구려. 온갖 허물어지고 희미해지는 것 사이에서 눈물이 찔끔 나기도
했지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결코 잘 보존해 왔다고 할 수 없지만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팍팍한 세월을 이겨내고 조선족이란 이름으로 살아준 200만 그들이 있기에 이나마 보존되어
있지 않나 싶어서, 그래서 고마웠다.
광개토대왕릉 바로 옆에 위치한 태왕향 조선족 소학교에서 우리 역사를 배우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을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며 그저 우리말만큼이라도 잘 배울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
다.
그리고 통일이 되면 이 땅은 조선족 동포들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지만 잃어버린 역사만큼은
남, 북한이 바르게 찾기를 희망했다.
취재협조=대한항공 02-751-7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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