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시내 백화점이나 호텔 등 외국 관광객들의 출입 잦은 곳을 방문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보면 양손에 한 보따리씩 쇼핑한 물건을 들고 서 있는 일본 여행객들을 자주 보게 된다. 부쩍 늘어난 개별 관광객들과 삼삼오오 짝을 이루며 서울 도심과 의류 매장을 찾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기웃거리는 이들 일본 관광객들을 보면 봄 햇살만큼이나 반갑다.

우리나라를 찾은 그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며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고 돌아 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전 세계가 굴뚝 없는 관광 산업에 매진하고 있고 우리 나라도 외래 관광객 유치를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는 시점에서 일본 관광객들의 한국 방문 증가는 더 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일본 관광객들을 볼 때마다 한번은 되돌아 보아야 할 것 같은 마음으로 역사 이야기를 하고 싶다.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미래를 비출 수 있다 하지 않았는가. 오늘은 한국 근대사를 되짚어 보며 관광지로서의 한국이 아니라 19세기말로 돌아가 외세 침략 시기의 우리나라와 일본인들을 잠깐이나마 한번 살펴 볼까 한다.

일본은 조선의 문호개방을 계속 시도하고 있던 미국으로부터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운양호 사건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조선정부는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며 불평등 조약인 병자수호조약(1876년)을 일본과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부산,인천,원산의 3개 항구를 개방했는데 이 때만해도 조선 민중들은 일본인들을 쉽게 마주치지 못했다.

개항 초기에는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지역을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개항 초에는 일본 상인들의 활동 범위가 개항장에서 내륙으로 겨우 10리까지 였다. 그러다가 1884년에는 100리까지 확대됐고 1885년부터 외국인의 내륙지방 여행이 자유화 됨에 따라 일본인들은 조선 전국을 여행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대 일본인들의 내륙지역 여행은 주로 쌀을 헐값에 사기 위한 식량 구매를 위한 것이었다. 조선에서 헐값에 사온 쌀은 일본 국내 쌀값의 3분의 1 가격이었으므로 일본 자본주의가 저임금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한편 그 당시 일본에 진출한 조선 상인은 한 사람도 없었지만 갑신정변 전까지 우리나라 개항지 세 군데에 살던 일본인은 무려 2,500여명으로 기록 되어져 있다.

19 세기말 그 신음하던 시대를 뒤로 하고, 봄을 재촉하는 2001년 3월의 초두에 서울 도심에서 지도를 갖고 두리번거리는 세 사람의 일본인 관광객들을 만났다. 그들이 찾는 명동의 한 식당까지 바래다 주고 오니 내 개인적인 저녁 약속 시간에는 약간 늦었지만 한국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갖고 돌아갔으면 한다. 19세기 말 침탈을 위해 우리 나라를 찾아 왔지만 이제는 우리나라의 국부(國富)의 신장과 진정한 상호 교류를 위해서 더욱 더 많은 일본 관광객들이 우리나라를 찾았으면 하는 마음과 함께….

호주관광청 한국지사 부장 schang@at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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