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치하에서 전무하다시피 하던 국내외관광은 1945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도 온양온천 철도호텔과 서울역 등 역 구내식당(열차식당 포함) 직영 및 철도승차권 대매업을 취급하는 조선여행사에 대한 감독업무 정도였다. 그러나 한국관광의 전기를 마련한 사건은 '한국 방문의 해'가 최초로 설정된 1961년이었다. 정부는 1960년 12월 7일에 개최된 국무회의에서 1961년을 '한국 방문의 해'로 선포하고 출입국 절차 간소화 조치 등 외래객 유치여건 조성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지난 1961년 집계된 한국관광공사(KATA)의 연도별 관광통계에 따르면 출국자와 입국자수는 1만여명으로 동등한 수치를 보였으나 해가 갈수록 입국자수가 많아지면서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10년 단위로 입국자 수를 살펴보면 1970년 17만3,000명, 1980년 97만6,000명, 1990년 295만8,000명, 2000년 532만1,000명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출국자 수는 1970년 7만3,000명, 1980년 33만8,000명, 1990년 156만명, 2000년 550만명을 기록해 이제는 입국자 수보다 출국자 수가 더 많은 상황이 도래했다.

인바운드의 본격적인 개막은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뤄지면서 급속한 전기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의 입국자수는 6만7,000명으로 전년동기대비 100%가 넘는 성장률을 보여 이를 반증했으며 일본지역 여행업체에서는 한국을 목적지로 한 신상품 기획 및 판매에 적극성을 띠게 됐고 교통부는 외무부, 법무부와 함께 협의를 거쳐 관광비자를 발급하면서 일본인 관광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968년 인바운드는 드디어 10만명이 넘는 입국자 수를 기록했지만 아웃바운드는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20∼30% 증가를 보여왔던 입국자 수는 1973년에 들어서 전년동기대비 83%가 넘는 성장률을 보이면서 관광호황기를 맞이했다. 관광수입 역시 억 단위를 돌파해 2억6,900만달러를 기록하면서 67만여명의 입국자수를 보였다. 당시 일본관광객은 전체입국객의 70%에 달했다. 그러나 73년 말엽 오일쇼크로 인해 1974년 관광객은 23%가 줄고 수입 역시 41%가 줄어들어 관광경기 침체기에 들어갔다.

오일쇼크를 극복하면서 관광객은 다시 늘었고 1978년 관광객은 100만명을 돌파하기 시작했으나 다시 1979년과 80년 제2차 오일쇼크와 정국불안으로 관광객이 100만명 이하로 떨어지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러나 정국이 안정되면서 다시 증가세로 돌아선 입국자 수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200만명을 돌파했으며 1989년에 해외여행자유화로 아웃바운드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89년 처음으로 100만명을 돌파했던 아웃바운드 관광객은 92년 200만명, 94년에는 300만명, 96년에는 400만명을 넘어서면서 2년마다 100만명 씩 돌파하는 급성장세를 보였다.

지난 95년 관광수입이 500억달러를 넘어서면서 전년동기대비 46.8%의 증가를 보이면서 입국자 수는 계속 늘었지만 지상비 저하에 따라 관광수입은 감소되는 양상을 보였다. 97년에는 외환위기가 발발한 여파로 출국자 수는 300만명대로 다시 떨어졌으나 원화의 평가절하에 따른 외국인 관광객 수요가 폭발하면서 98년 입국자수는 400만명을 돌파했다. 출국자 수 역시 1999년 들어 다시 97년 수준으로 회복됐고 2000년에는 출입국자 수 모두 500만명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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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주 기자 hippo@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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