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과 한 시간만에 순백의 설국이 물안개 피어오르는 청초한 호반의 세계로 변했다. 그렇다. 푸른초원과 알프스산맥 연봉들과 함께 스위스를 상징하는 자연적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호수일 게다.

해발고도 3,000 미터의 '글래시어 3,000'에서 내려와 우뚝우뚝 솟은 고봉준령들을 휘감아 돌고 때로는 뚫고 달리기를 한시간 가웃, 바다를 닮은 드넓은 호수가 와락 시야에 달려든다. 제네바 호수(Lake Geneva)다. 총 표면면적이 584 제곱킬로미터에 달하고 호수의 최장 길이는 무려 72.3 킬로미터에 이른다. 평균 폭 또한 8 킬로미터를 넘고, 최대 깊이는 무려 310 미터에 육박한다. 프랑스와 국경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유럽 최대의 담수호라는 명성에 걸맞는 당당한 위용이다. 그야말로 육지 속 바다인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제네바 호수라는 공식명칭대신 '바나나 호수'라는 애칭을 즐겨 사용한다. 이는 호수가 길쭉하고 바깥으로 약간 굽어 영락없이 바나나 모양이기 때문이다. 최고 수온은 고작 23도에 불과에 수영은 불가능하지만 매년 요트경기대회를 비롯해 웬만한 해변 수준을 초월하는 각종 수상레포츠가 열리고, 크루즈선은 몽트뢰(Montreux), 비뵈(Vevey), 제네바(Geneva), 니용(Nyon). 에비앙(Evian) 등 호수를 따라 발전한 스위스와 프랑스의 주요 도시를 정기적으로 운항,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에게 호수와 호수를 중심으로 발전한 문명을 생동감 있게 전하고 있다.

또 호수를 텃밭 삼아 살고 있는 이곳 어부들이 잡아올린 싱싱한 생선은 호수변 주민들과 외지인들의 입맛을 돋운다. 세계 문명이 주요 강을 중심으로 발전했듯이 이곳은 제네바 호수가 문명의 자양분이 된 셈이다. 한 때 호수변 도시 중 하나인 비베에서 거주했던 찰리 채플린은 ""저녁 무렵 태양은 호수면에 한없이 은은한 빛을 발하며 저물어 가고, 저 멀리 묵묵히 서 있는 눈쌓인 산과 파란 잔디는 호수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키며 나를 행복의 한 가운데로 이끌었다""고 이곳의 분위기를 전했다. 비뵈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호수 반대편 프랑스 땅을 지긋이 바라보며 여전히 행복의 한 가운데에 있다.

실제로 해발고도 3,000 미터의 글래시어 3,000에서 꼬불꼬불 이어진 험준한 산악길을 달리다기 불현듯 눈 앞에 펼쳐진 드넓은 호수와 맞닥뜨리면 한 시간 가까운 사행질주의 고역도 메스꺼움도 일거에 사라짐을 느낄 수 있다. 호수에는 물안개인지 눈가루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의 아득한 신비로움이 가득하다. 올올 솟은 산봉우리들은 잔설을 이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호수면에 그대로 투영하며 호젓함을 더한다. 여기에 호수가에 피어오른 빨강, 노랑, 초록 튤립의 원색의 아름다움과 수없이 물자맥질 치는 오리떼들이 더해져 가슴 속에는 또 하나의 호수가 생겨난다.

사실 스위스에는 넓고 깊은 호수가 참으로 많다. 호수로 흘러드는 알프스의 눈 녹은 물만큼이나 새뜻한 호반도시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루가노가 그렇고 루째른이 그렇고 로카르노가 그렇다. 지붕까지 투명유리로 꾸며져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파노라마 특급열차'를 이용해 보라. 특히 루째른-인터라켄 구간에서는 기차 양옆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호수들의 대향연에 넋을 놓기 일쑤다. 이들 호수와 호반도시들의 공통점은 바로 잔잔함과 고요함이다. 언젠가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노년에 가장 살고 싶은 국가' 설문조사에서 스위스가 1위에 오른 것은 바로 그런 정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됐기 때문이리라.

제네바 호수는 스위스의 여느 호수의 매력 위에 역동성과 생동감이라는 매력을 추가해야 한다. 몽트뢰비뵈로잔으로 이어지는 호수 동부 지역에 발을 들여보면 누구라도 이에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몽트뢰와 비뵈는 축제의 열정이 가득하다. 특히 음악, 미술 등을 주제로 한 예술 축제로 유명하다. 매년 3월과 7월에 몽트뢰에서 열리는 재즈 축제를 필두로 4월 합창 축제, 6월의 코미디 축제, 8월 비뵈에서 열리는 거리예술축제, 8월말 몽트뢰의 음악축제 등 매월 화려한 축제와 이벤트가 개최된다. 지난 1967년 처음 개최된 몽트뢰 재즈축제는 재즈를 주제로 한 세계 최고·최대라는 명성을 얻고 있다. 이밖에도 와인생산업자의 축제, 세계TV포럼, TV트레이드워크숍, 크리스마스 마켓 등도 제네바 호수에 활력을 더하고 있다.

로잔은 또 어떤가. 로잔은 이미 '올림픽 도시'로 너무나도 유명한 지역.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가 지난 1915년부터 자리잡고 있으며, 지난 93년에는 세계 최초이자 올림픽과 관련된 세계 최대의 문서와 자료를 소장한 '올림픽 박물관(Olympic Museum)'이 들어서 명실상부한 올림픽 도시, 스포츠 도시로 확고한 자리매김을 했다. 올림픽 박물관은 특히 지난 88서울올림픽의 감동을 다시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절대 빼놓수 없는 관광포인트라 할 수 있다.

전시실에는 1936년 베를린 대회 때부터 시드니 올림픽 때까지 실제 올림픽 경기의 개막을 알렸던 성화가 전시돼 있는데 임춘애 선수가 마지막 주자로 봉송한 88서울올림픽 때의 성화도 당당하게 전시실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 감회가 남다르다. 또 호돌이와 태극무늬 부채, 올림픽 경기장 모형 등도 색다른 기쁨을 선사한다. 올림픽 창시자인 쿠베르탱의 사진과 함께 김운용 위원의 사진과 프로필이 소개되고 있는 것도 뿌듯한 자긍심을 불러 일으킨다.

로잔은 또 매년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로잔마라톤대회 등과 같은 각종 스포츠 대회를 개최하고 있어 올림픽 도시의 명성을 더욱 드높이고 있다. 이들 3개 도시는 각각 인구 10만 안팎의 소도시임에도 불구하고 호수의 호젓함에 스포츠와 축제의 열정을 덧칠해 '작지만 모든 것을 갖춘 도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호수 동쪽의 몽트뢰에서 시작해 호수 끝자락 도시 제네바까지 호반도시들을 차례차례로 섭렵해 볼 일이다. 혹은 프랑스 파리에서 떼제베로 제네바로 들어오거나, 비행기를 이용할 경우 제네바국제공항으로 들어와 제네바를 호수탐험 여정의 시발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스위스 몽트뢰~로잔 글·사진=김선주 기자 vagrant@traveltimes.co.kr
취재협조=내일여행 02-777-3900, www.naeiltour.co.kr


스위스 이렇게 즐겨도 좋다!
시간이 촉박하다면 호반도시 섭렵 대신 몽트뢰에서 38 킬로미터 떨어진 글래시어 3,000에 오르거나 지금까지도 150여 농가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치즈를 생산하고 있는 샤또독스(Chateau-d'Oex)에 들르면 제격이다. 글래시어 3,000은 '제2의 융프라우요흐'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올 봄부터 본격 영업에 들어갔다. 융프라우요흐보다 고도는 낮지만 그에 못지 않은 아득한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케이블카를 이용해 불과 10여분 만에 해발고도 3,000미터의 봉우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다. 이곳은 1년 중 11개월이 눈으로 뒤덮여 있어 스키, 스노우보드, 스노우골프, 개썰매, 스노우튜브, 스노우하이킹 등 각종 겨울스포츠를 사실상 일년내내 즐길 수 있다. 글래시어 3,000의 내부에는 2개의 레스토랑이 마련돼 있는데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텔아비브 문화센터, 도쿄미술관 등을 디자인한 스위스의 유명 디자이너 마리오 보타(Mario Botta)가 직접 디자인한 것으로 유명하다. 어떤 식으로 여정을 잡더라도 알프스산맥과 새하얀 눈, 태양, 푸른 잔디와 어우러진 제네바호수의 매력을 물씬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호수가 있어 더욱 아름다워짐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
저작권자 © 여행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