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원
호주정부관광청 한국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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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은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정치학자들에게도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다. 단 한사람의 정치개혁사상이 조선왕조 몇백년을 지배했을 뿐 아니라, 시대를 넘어 오늘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국가 정치시스템을 개혁함으로써 민본주의(民本主義)를 실현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건국의 파트너로 이성계를 선택한 것도,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왕조, 조선의 기틀을 잡아놓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그의 모든 개혁사상은 몇백년 전 왕조체제 외에는 다른 세상을 몰랐던 사람으로서는 파격이었다. 정도전은 현명한 왕의 통치하에서는 태평성대이지만, 폭군이 등극하면 일반 백성의 삶이 극도로 피폐하게 되는 것을 문제점으로 보았다. 그래서 국가가 한 사람에 의해 농단되는 것을 최대한 제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육조 시스템을 도입하고, 재상이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는 정치체제를 만들어냈다. 어찌 보면 이는 오늘날 입헌군주제나 민주주의 체제하의 정당정치 개념과도 비슷하다. 정도전은 귀족계층의 백성에 대한 수탈이 끊이지 않는 점에 주목, 토지 공개념까지 도입하려 했다. 즉 권력을 쥐고 있는 일부 계층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들을 국가소유로 모두 거둬들여 다시 실제 농사를 지을 당사자들에게 골고루 나눠줌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생업을 보장하는 방안을 고민했던 것이다. 세습이 아닌 과거제도를 통한 인재발탁을 통해, 세계 역사상 성공사례가 극히 드물다는, 문(文)이 무(武)를 지배하는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권력을 나누어가질 생각이 없었던 이방원에 의해 척결되면서 정도전의 개혁정치는 종결되는 듯했다. 허나 놀랍게도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 내내 살아 숨쉬었다. 왕이 절대 권력을 구가하지 못하고, 사대부들이 오백년이나 한 시대를 이끌어갔던 것이다. 왕권을 강화하려던 수많은 조선의 왕들은 의문사를 맞거나, 신하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거되곤 했던 것이다.

정도전의 개혁사상은 실행과정에서 그 본 취지와는 다르게 변질됐던 것 같다. 개혁안은 일반 백성의 안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사대부라는 특권계층의 전횡을 뒷받침해주는 이론적인 근거로도 악용됐다. 정도전이 염려했던 일반 백성의 삶은 여전히 고단했으며, 백성들은 권력층을 견제할 수 있는 어떤 힘도 가지지를 못했다. 예를 들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했던 수양대군은 자신을 도왔던 공신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새로운 특권층을 만들어냈으며, 막대한 재산뿐 아니라 그들의 자손 대대로 살인죄를 저질러도 면죄부를 줄 정도의 절대권력을 공신들의 손에 쥐어 주었다. 당연히 이로 인해 민초들이 겪는 폐해는 극에 달했다고 한다. 세조의 아들인 예종은 이를 바로 잡고자, 공신들의 막강한 특권을 다시 뺏어오려고 시도하다가, 즉위 14개월 만에 의문사를 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많은 조선의 왕들은 권력을 쥔 신하들과 줄다리기를 하며 왕위를 지켜나가야 했던 것이다.
치열한 고민 끝에 탄생했을 정도전의 개혁사상과 정치시스템은 왕을 견제하는 역할은 했을지 몰라도, 사대부라는 권력계층까지 제어하지는 못했다. 백성들은 계속 힘없는 백성들로 살아갔던 것이다. 역사 속의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정작 일반 백성에게 그들의 목소리와 힘을 되돌려준 것은 정도전을 주살했던 태종 이방원의 아들 세종대왕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정도전이 구상해놓은 개혁적인 정치사상과 시스템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누구나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 쉬운 우리의 글과 시간개념(시계)을 세종이 백성들의 손에 쥐어줌으로써 실현됐다.

민주주의는 단지 서양에서 수입된 것만은 아닌 듯 싶다. 우리 고유의 민본주의 역시 이렇게 우리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마침내 발현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가공의 인물과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TV사극 <뿌리깊은 나무>가 어쨌든 흥미진진하고, 보는 재미가 있는 이유다.

■이번호를 끝으로 최승원 지사장의 칼럼은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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