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 언제인지 기억하는가?
크레파스를 쥐고 흰 도화지에 거침없이 쓱쓱 그리던 어린 시절의 환희를 너무 오래 잊고 산 것은 아닌지.
여행을 좋아하는 <트래비> 독자라면 시도해 봐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그림 여행’이다.
 
 
만화광의 첫 창작

꿈 많고 할 일은 없던 초등학생 시절의 나는 만화를 무지하게 좋아했다. 하릴없이 뒹굴대며 만화책을 보는 운치란. 특히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리는 날에는 종일 형광등 아래서 꼼짝하지 않고 만화책을 읽곤 했다. 동네 만화 책방을 다 휩쓸고 빌릴 것이 마땅찮았을 무렵, 갑자기 창작욕이 불타 올랐다. 그래, 내가 직접 만화를 그려 보는 거야. 그후 방학 내내 하얀 연습장에 오색 수성펜을 동원해 만화를 그렸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주인공이었는데 당시 읽던 책이 <서유기>였기 때문이다. 손에서 잉크 마를 날이 드물 만큼 꽤나 공을 들인 끝에 드디어 완성. 처음 만든 작품을 들고 감격스러워했음은 물론이다. 어느 날 친척 동생이 오랜만에 집에 놀러왔다. 같은 초등학생이고 밤새 컴퓨터게임을 즐기던 사이였다. 만화를 보여 줬는데 읽고 난 그 아이의 반응은 예상 밖으로 썰렁했다. “형,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다시 그리고 싶던 충동

친척 동생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시 보니 나조차도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림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음 속 ‘작은 예술가’는 큰 상처를 입었다. 이후 지금까지 시험에 관련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그림도 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림 자체가 싫어진 것은 아니다. 여행지에서 시간이 허락하는 한 현지 미술관을 꼭 가보곤 하니까. 그중에서도 지난번 캐나다 오타와 소재 국립미술관에서 만난 클림트의 작품은 압권이었다. 아무 정보 없이 방문했다가 무심코 모퉁이를 돌았을 때 걸려 있던 <희망1>을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 서 있는 임산부의 나신이 아름답게 담긴 작품 아래 있자니 주변의 다른 명화들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조명에 비치는 클림트의 붓 터치, 물감의 질감, 심지어 내 숨소리에 흔들리는 듯한 여인의 치모까지. 사진이나 컴퓨터 화면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감흥이 거기 있었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곳곳에 촬영을 제지하는 관리자들이 많아서 차마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돌아섰다가 아쉬움에 다시 그림 앞에 선 것이 몇 번이었던가. 처음이었다. 전신을 휩쓸고 지나간 감흥을 그림을 그려서라도 남기고 싶었던 적은. 그러나 종이와 펜이 있었음에도 아무것도 그리지 못했다. 용기도 재주도 부족했으니까.

그림, 내 몸을 거친 기록

아마 많은 사람들도 나처럼 그림과 담을 쌓고 살 것이다. 하지만 그림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김홍도와 같은 천재 미술가들만의 전유물일까? 휴대폰으로도 사진 찍는 편리한 세상에 뜬금없이 웬 그림이냐고 묻겠지만 둘의 세계는 엄연히 다르다.

사진이 찍는 순간을 그대로 붙잡아두는 ‘찰나의 미학’이라면, 그림은 이미 지나간 과거를 회상해 다시 손으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얼마든지 자신의 주관이 반영될 수 있다. 또한 사진은 지금 내가 존재하는 순간에만 찍을 수 있지만 그림은 상상력에 따라 시공을 초월해 우주 끝, 천국과 지옥의 모습까지 보여 줄 수 있다. 과거를 더듬어 끄집어낸 기억이 나의 육체를 거쳐 흰 도화지에 쏟아질 때 백인백색百人百色의 창작물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 그것만으로도 개성을 중시하는 당신에게 ‘나만의 그림’이 주는 매력은 충분할 것이다.
 
카메라를 놓고 여행지로

<그림 여행을 권함>에서 작가는 우리가 잊고 살아온 ‘그림의 맛’을 넌지시 알려준다. 제정신을 허용치 않는 일상에서 기력이 다하면 사람들은 충전을 위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그 순간에서조차 우리는 쫓기기 일쑤다. 한정된 시간, 볼 것은 가득. 그래서인지 배경은 똑같고 사람만 바뀌는 사진, 추억은 없고 허세와 과시만 가득한 사진이 득실득실하다. 이런 여행자의 모습은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사회인과 마찬가지. 팍팍한 삶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에 놓인 그 순간에, 기억을 기록으로 치환하는 작업을 조금 늦춰 보는 것은 어떨까.

그림은 느리지만 보는 만큼 그릴 수 있다. 그만큼 자신이 있는 곳에 집중하게 하고, 놓치고 지나가던 것에 눈뜨게 한다. 여행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표현의 수단만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천천히 음미하는 여행, 가슴에 피어난 여운을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인 것이다.
 
글=김명상 기자 

그림 여행을 권함 저자는 사진기 대신 스케치북을 들고 여행을 다니는 여행자로 지난 10여 년 동안 틈틈이 그려 온 그림들을 소개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여행을 어떻게 다르게 만드는지 보여 준다. 내려놓아야 할 여행지에서조차 기계적으로 카메라 셔터만 눌러 대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그림 여행으로의 초대장을 슬쩍 내민다. 당부도 잊지 않는다. 여행지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막는 것은 잘 그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책은 ‘맘대로, 닥치는 대로 그릴 것’을 권한다.  김한민 지음│민음사│1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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