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주의 화가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 1870~1943)는 ‘역사상 유명한 사과가 셋 있는데, 첫째가 이브의 사과이고, 둘째가 뉴턴의 사과이며, 셋째가 세잔의 사과’ 라고 했다. 만약 모리스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스티브 잡스의 한 입 깨문 <애플> 로고를 네 번째 사과로 포함시켰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한 입 깨문 사과는 ‘이브의 사과’를 연상시킨다. 두 사과 모두 인류의 운명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일대의 사건이이기 때문이다. 먼저 스티브 잡스의 사과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 II>개발로 인간에게 주어진 기억 처리 능력의 한계 극복은 물론, 시간과 공간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엄청난 양의 업무를 단시간에 소화할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개개인에게 선물했다.

현대인에게 컴퓨터, 스마트폰, 인터넷이 없는 생활은 전기와 불의 부재만큼이나 상상하기 힘든 것이 됐고, 인류가 그 동안 쌓아놓은 문명의 양 이상의 정보를 단 몇 분 만에 처리할 능력을 갖게 됐다. 삼성 갤럭시S5의 CPU 처리 속도는 1988년 미국 나사(NASA)에 설치한 슈퍼 컴퓨터와 비슷하다. <무어의 법칙>에 따르면, 마이크로 칩에 저장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이 18개월마다 2배씩 증가한다. <타임>은 최근 1시간의 컴퓨터 기술변화가 지난 90년의 변화 속도와 맞먹는다고 밝혔다. 과학자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2030년경이면 스마트폰이 우리 두뇌와 같은 기능을 하게 되고 그 후 과학기술이 우주의 섭리를 깨닫게 되는 시대가 온다고도 전망한다. 이 정도 속도라면 멀지 않은 미래에 인류에게 불과 철의 발견과 비견될 만큼 인간의 생활이 획기적으로 변화되는 ‘기술적 특이점’(기술 변화의 속도가 급속히 변해 그 영향이 넓어져 인간의 생활이 되돌릴 수 없도록 변화되는 기점을 뜻한다)에 도달할 것 같다.

스티브 잡스의 사과가 기술 분야에서 새로운 문을 열었다면, 이브의 사과는 좀 더 범인류적이다. 존재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의 모습을 그린 두 화가의 그림을 비교해 보자.

마사초(Masaccio, 1401~28)가 그린 <낙원 추방(The Expulsion from the Garden of Eden)> 속의 두 사람은 절망스럽고 비통한 표정이다. 반면, 뒤러의 <아담과 이브(Adam and Eve, 1509)>는 오히려 당당하게 벗은 몸을 드러내 보이며 오히려 희망에 가득 찬 모습이다. 마사초 그림 속의 인간은 하나님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과 원죄에 대한 공포로 고통 받는 모습이라면, 뒤러의 그림 속에서는 하나님의 관리감독을 벗어나 새로운 인류의 역사를 시작하는 것에 대한 자긍심마저 엿보인다. 마사초의 그림에서 나오는 미카엘 천사도 보이지 않는다. ‘실락원’이 오히려 진정한 인류역사의 시작이라고 보는 르네상스적 해석이다. 감히 추측해 보건데,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뱀이 건넨 사과를 아담과 이브가 베어 물 것을 몰랐을 리 없다. 분명한 것은 이 ‘선택’을 통해 인간에게 ‘자의식’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이 사과 사건을 인간이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해석한다.

역설적이긴 하나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쫒겨 나며 받은 형벌, 즉 ‘원죄’는 오히려 축복일 수도 있다. 고통이 적다면 기쁨의 크기는 오히려 줄어들고, 죽음이 없다면 삶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아무 근심도 부족함도, 선택의 필요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낙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속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사랑과 실연, 희망과 절망 등 끊임없는 대척점을 경험하며 좀 더 행복하고 가치 있는 ‘그곳’, 샹그릴라를 꿈꾸는 인간의 마음이 낙원을 존재하게 만든다.

따라서 인간에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의 값은 참으로 비싼 것이다. 낙원을 잃고서야 비로소 낙원의 가치를 깨닫고 갈망하게 된 우둔한 인간이지만, 낙원 그 이상의 무엇이라도 스스로 그 가치를 지각하지 못한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에 모든 사람은 세상의 중심, ‘옴파로스(Omphalos)’ 적 존재다. 따라서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의문과 시련과 고통은 오히려 축복일 수 있다. 내가 절절하게 이 세상에 발 딛고 있다는 반증이자, 인생 자체를 형성하는 삶의 흔적들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이라니, 그 얼마나 지루하고 시간이 더디겠는가. 차라리 지금처럼 번뇌 속에 허우적거리더라도, 무딘 칼 하나로 수많은 사건들을 헤쳐 나가야 하는 밀림 속의 삶에 남고 싶다. 비록 나를 만든 창조주께서는 이 우둔한 인간을 바라보시며 한숨을 지으시겠지만 말이다.
 
 
저자 EBS 지식채널e┃출판사 북하우스
 
박지영
주한FIJI관광청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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