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있어 일본여행] 잘 우려낸 한 잔의 역사
[기다리고 있어 일본여행] 잘 우려낸 한 잔의 역사
  • 곽서희 기자
  • 승인 2021.01.05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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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eriences in JAPAN Tradition
기모노 차림의 게이샤 인형
기모노 차림의 게이샤 인형

처음엔 부끄러운 마음이 컸다. 여행을 할 때마다 여행지의 역사도 모르고 방문하니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때부터였다. 출발 전 의도적으로 역사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모름지기 역사 정도는 알고 가줘야지, 라는 느낌의 알량한 허영심도 한 스푼 있었다. 그런데 그 얄팍한 계기 덕에 ‘역사 검색’은 어느덧 습관으로 굳어졌다. 이제 역사와 전통에 대한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여행을 가면, 텅 빈 껍데기 위에 덩그러니 서있는 기분이다. 외롭고, 휑하다. 나에게 역사 없는 여행은 반토막짜리 여행이 돼버렸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다. 전통은, 말하자면 잘 우려낸 차와 같다. 오랫동안 찬찬히 시간이 우러나올수록 맛은 더 짙어진다. 국가와 지역마다 고유의 차 맛이 있듯, 전통도 그렇다. 그중 일본의 전통은 유난히 단짝이 있다. 자연이다. 일본의 전통과 자연은 이를테면 차와 다과 같은 것이다. 서로 어우러질 때 풍미가 배가된다. 숲과 신사, 성당과 바다, 정원과 연못. 모자람 없는 조합이다. 여행자는 그저, 예쁘게 차려진 다과상을 양껏 즐기기만 하면 그뿐이다. 그래서 고백한다. 오늘만큼은 사치를 좀 부려보고 싶다. 삼나무 그늘 아래에서 호젓하게 다과상 가득 차려놓고 풍류를 즐기는, 그런 종류의 사치 말이다. 아, 물론 진짜 다과상 얘기는 아니다.  


●고요하고 아늑하게
와카야마 고야산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어느 정도까지 자신을 비워 낼 수 있는지 깨달았다. 
와카야마현 고야산에서 고요하고 아늑하게. 

사찰 곤고부지 입구
사찰 곤고부지 입구

고불고불한 산길을 달렸다. 고야산 해발 1,000m에 자리한 일본 불교 진언종의 총본산인 곤고부지와 고야산 중심부의 사찰 단조가란으로 향했다. 좁은 산길에 비해 몸체가 다소 커 보이는 버스에 앉아 황홀하고 아찔한 절벽을 탄 게 한 시간 남짓이었나. 타다닥. 전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해 노곤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던 나는 차창에 부딪치는 나뭇가지 소리에 혼곤한 잠에서 깨고 말았다. 아, 그 시간에 고야산의 농염한 가을을 사진에 담아 올 수 있었더라면.

고야산에 있는 사찰 단조가란의 곤폰다이탑
고야산에 있는 사찰 단조가란의 곤폰다이탑

고야산은 와카야마현에 있는 높이 1,000m 전후의 산들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이곳 8개의 산봉우리와 분지의 모양새가 마치 연꽃이 피어 있는 형상과 닮아 있어 불교의 성지가 됐다. 곤고부지에 도착한 시간은 해가 저문 어스름한 저녁이었다. 어쩌면 그때 도착한 덕분에 사찰의 느낌을 더 아늑하고 고요하게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느린 걸음으로 입구의 돌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는 동안 낙엽이 머리 위를 간지럽게 스쳤다. 저 멀리 핀 단풍이 붉은 별처럼 반짝였다. 사실 올 가을 들어 처음으로 느껴 보는 단풍이라고 해도 좋다. 마음에 계절이 들어설 공간이 없어 힐끗 보아도 시샘하게 될까, 즐기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 집 앞 단풍인데 이렇게 바다 건너 고야산에서 위로를 받게 될 줄이야. 느낌이 좋았다. 누군가 이번 여행의 시작을 물어보았다면, 나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이 순간을 답으로 주었을 것이다.

고야산에 있는 사찰 단조가란의 곤폰다이탑
고야산에 있는 사찰 단조가란의 곤폰다이탑

곤고부지
주소  132 Koyasan, Koya-cho, Ito-gun, Wakayama-ken, 648-0294
홈페이지  www.koyasan.or.jp

 

고야산 달이 휘영청


고야산에는 100개가 넘는 사찰이 있다. 산의 성지를 찾아 해마다 전국 각지와 세계에서 참배객이 몰리는데, 그들을 위해 숙방을 제공하는 곳도 무려 50여 군데에 이른다. 가을에는 보통 일본인이 30%, 외국인이 70%의 비율로 숙방에 머무르고, 벚꽃이 화사한 봄에는 외국인 비율이 90%를 차지하기도 한단다. 커다란 객방에 앉아 스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채식 사찰 음식인 쇼진 요리까지 비웠을 때 조금 과장해서,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다다미방으로 돌아오니 폭 안기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지도 모를 푸근한 이부자리가 준비돼 있었다. 손님이 식사를 하는 동안 수행 스님들이 별도로 준비를 해 두었던 것. 실내 히터를 켜고 그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워 말 없는 상태를 즐겨 보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침묵이 들려왔다. 전에는 몰랐는데, 소리 없음도 사실은 소리가 있는 것이더라.

고야산 료칸에서 볼 수 있는 일본식 정원
고야산 료칸에서 볼 수 있는 일본식 정원

그날 밤에 한 것은 두 가지로 요약이 가능하다. 편의점 산책과 달 보기. 편의점을 다녀오는 길에 숙방 앞에 서서 만면에 달빛을 받았다. 이 기억이 그날 밤의 하이라이트였다. 소원을 중얼거리면 들을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달을 느꼈다. 휘영청, 그 빛은 가히 해발 1,000m 높이의 위엄이었다.

호온인 료칸
호온인 료칸

“굿모닝”, 다음날 밖에서 누군가에게 건네는 스님의 아침 인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다시 행간의 고요함이 무겁게 이어진다. 시간 간격을 두고 울리는 말간 종소리와 불경 소리, 여기에 사그락거리는 이불 소리까지 더해져 귀도 마음도 호사를 누리는 좋은 아침이었다. 머리맡 종이 창문에 가을 햇살의 조명을 받은 단풍나무가 어여쁘게 춤을 춘다. 순간을 붙잡아 길게 늘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한동안 이불 속에서 몽롱한 헤엄만 열심히 치다가 가까스로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휴. 

채식 사찰요리인 쇼진요리
채식 사찰요리인 쇼진요리

호온인 템플스테이
주소: 283 Koyasan, Koya-cho, Ito-gun, Wakayama-ken, 648-0211
전화: +81 736 56 2350
홈페이지: www.hoon-in.com


●정갈한 감성 차분한 휴식  
후쿠이


일상을 내려놓고 오롯이 휴식으로 여행을 채우고 싶을 때, 
이제는 후쿠이가 먼저 떠오른다. 

삼나무 가득한 에이헤이지
삼나무 가득한 에이헤이지

삼나무 품에서 마음의 평온을


일본 조동종의 대본산 에이헤이지에 발을 들이면 장엄하게 솟은 삼남무가 여행자를 맞이한다. 에이헤이지는 1244년 도겐선사가 개창한 곳으로 불전, 승당, 법당 등 칠당가람이라 불리는 일곱 개의 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전히 이곳에서는 많은 스님들이 수행에 정진하고 있다. 경내를 돌아다니면 검은 수행복을 입은 그들을 마주칠 수 있는데 절제된 행동에서 기품이 느껴진다. 

에이헤이지 가는 길
에이헤이지 가는 길

여행의 시작은 삼나무 길부터다. 삼나무가 가득한 이곳은 사계절 어느 때 오더라도 각각의 매력이 가득한데, 봄에는 삼나무 사이를 파고드는 따스한 빛에 마음이 차분해지고, 햇볕이 쨍쨍한 여름날에는 삼나무의 온전한 초록빛을 감상할 수 있다. 또 비가 온 후라면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이끼의 생생함을, 겨울에는 하얗게 물든 사찰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다. 

에이헤이지 상점가
에이헤이지 상점가

본격적으로 목조 건축물의 향기를 느끼며 경내를 돌아다녀 보자. 70여 채의 전, 당, 누각이 회랑으로 연결돼 있어 탐험하는 기분마저 든다. 불전, 승당, 법당 등 주요 공간들이 각각의 특징에 맞게 꾸며져 있는데, 법회가 치러지는 법당의 금빛 장식물은 샹들리에보다 2~3배는 커 에이헤이지에 웅장함을 더한다. 산쇼카쿠의 천장을 가득 채운 230점의 그림은 에이헤이지의 백미로 꼽히는데 만개한 꽃과 새들이 주로 그려져 있다. 고개를 한참 들고 있거나, 조금 더 욕심내 누워서 천장의 작품을 여유롭게 즐겨 보자. 


에이헤이지를 깊숙이 알고 싶다면 하루 머물며 스님들과 같이 생활하는 ‘원나이트 스테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된다. 좌선을 통한 명상, 전통 사찰 식사, 아침 수행 등 에이헤이지에서 온전한 하루를 보내며 스님들의 삶을 체험할 수 있다.

정감 가득한 노면전차
정감 가득한 노면전차

일본의 향기가 스며들다


후쿠이현청 소재지인 후쿠이시는 일본 특유의 차분하고 정갈한 감성을 느끼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또한 사랑스러움이 가득한 도시로, 봄에는 아스와강을 가운데 두고 2.2km의 벚꽃터널이 수많은 사람들을 맞이한다. 일본의 향기를 만끽하려면 요코칸 정원과 아타고자카 등을 방문하거나 1량짜리 노면전차를 타고 후쿠이 곳곳을 탐방해야 한다.  

요코칸 정원
요코칸 정원

잘 가꿔진 나무와 꽃들이 반기는 요코칸 정원은 후쿠이의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가문의 별장이다. 문헌상에 이곳이 처음 등장한 것은 1656년으로 360년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당시의 모습을 유지한 채 후쿠이를 지키고 있다. 연못 주위를 돌며 다실풍 건물양식의 저택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으며, 봄의 매화와 벚꽃을 시작으로 여름 수국, 가을 단풍, 겨울 설경 등 사시사철 변하는 정원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수려한 풍경 덕분에 신혼부부들의 웨딩촬영지로도 인기가 많다.  

후쿠이의 유명 돌길 아타고자카
후쿠이의 유명 돌길 아타고자카

다음은 교토의 니넨자카, 산넨자카처럼 유명한 돌길 아타고자카다. 청록색 돌이 줄지어 늘어선 길을 따라 올라가면 후쿠이시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대와 아스와 신사를 방문할 수 있다.

소스 가츠동
소스 가츠동

특히 아타고자카는 노을 지는 시간대와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는 어둑한 시간에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로 유명하다. 허기가 진다면 후쿠이의 소스 가츠동(돈가스 덮밥)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후쿠이의 가츠동은 흔히 접하는 밥을 계란과 돈가스로 덮은 형태가 아니다. 돈가스를 새콤달콤한 비법 소스에 푹 담가 밥에 올린 형태로, 신맛과 단맛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소스가 느끼한 맛은 잡아 주고, 돈가스에 촉촉함을 더해 남녀노소 누구나 푹 빠져들게 만든다.

 

에이헤이지
주소  5-15 Shihi Eiheiji-cho, Yoshida-gun, Fukui-ken 910-1228, Japan
전화  +81-776-63-3188
홈페이지  daihonzan-eiheiji.com


●조금 생소해도 괜찮아
아이치 이누야마


낯선 아이치, 어딜 가나 모르는 것 투성이. 
발동하는 호기심을 무기 삼아 향토 음식을 먹었고, 오래된 골목길을 거닐었다. 

이누야마성 오르는 길
이누야마성 오르는 길

중세 일본의 낭만에 취하다


아이치현 북부를 지나는 기소강이 유유히 흐른다. 강을 사이에 두고 기후현 최남단의 가카미가하라시와 아이치현 최북단의 이누야마시가 서로 마주한다. 이누야마는 기소강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군웅들의 부침을 오롯이 간직한 마을이다. 전국시대 이후 수많은 세력이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기소강 위에 세워졌던 이누야마 성채가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거나, 주변으로 펼쳐진 노비 평야의 풍요로움을 차지하기 위해서였을 터. 그 수많은 부침에도 불구하고, 이누야마성은 여태껏 한 번도 파괴된 적이 없었다.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라고 한다. 

기모노를 입고 이누야마 시내를 걷는 모습
기모노를 입고 이누야마 시내를 걷는 모습

성문이나 성벽은 많이 사라졌지만 주변 마을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오래된 상가 건물들이 이어지는 거리에는 전통 화과자를 파는 카페나 자그마한 식당 등이 눈에 띈다. 언제부터 있었을까 싶은 구멍가게도 ‘영업 중’이라는 표지를 내걸고 있었다. 기모노를 입고 거리를 거니는 이들도, 인력거를 끌며 손님에게 마을을 소개하는 청년들에게도 웃음이 가득했다. 모진 역사를 견뎌 낸 마을이 이제야 누리게 된 것들은 소박했지만, 이누야마의 모든 것들이 걸어온 발자취와 함께 빛나고 있었다. 

 

이누야마성
주소  Inuyama Kitakoken 65-2, Inuyama-City, Aichi-ken   전화  +81-568-61-1711  
입장료  성인 550엔, 14세 미만 110엔 
홈페이지  www.inuyama-castle.jp

 

곽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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