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모르는 중국 여행은 ‘속없는 진빵’ 먹기와 다를 바 없다.
주나라부터 당나라까지 13개 왕조의 도읍지를 거친 서안은 중국역사의 축소판. 왠만한 건물, 관광지마다 2,000∼3,000년 시간은 족히 품고 있다. 양귀비와 당현종의 세기를 뛰어넘는 로맨스와 사진으로만 보아 온 진시황의 지하세계가 발아래 펼쳐지는 곳이 바로 서안이다.
발길 닿는 모든 곳이 바로 역사로 이어지는 서안은 ‘아는 만큼 느낀다’는 단순한 여행 진리를 여실히 증명해 주는 곳. 서안 관광을 눈만이 아닌 ‘귀로 듣는 관광’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안은 오래된 역사만큼 얘기 거리도 많이 간직하고 있다. 92년 생긴 함양공항에서 서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강태공이 낚시하던 위수를 지나는데 황토물인 위수는 거울처럼 맑은 수질의 경하를 만나 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이 때 두 강이 만나면서 서로 한 번에 섞이지 못하고 경계를 이루는 데 이를 가리켜 오늘날의 ‘경우가 분명하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서안의 옛 이름은 명나라 초기까지 장안이었다. 옛 도읍 장안에 당도하면 이 곳 명물인 명나라 성벽을 마주하게 된다. 성벽 안에 들어서면 이제부터가 진짜 옛 장안의 흥망이 지난 간 자리다.
서안거리를 거닐다 보면 곧 눈치 챌 수 있지만 이 곳에는 구부러진 길이 하나도 없다. 시내 중심에는 높이 35m의 종루가 서 있고 이를 중심으로 모든 길이 네모 반듯한 십자를 이루고 있다. 직선으로만 이뤄지다 보니 지름길이 없다는 것도 서안만의 특징이다.
실크로드의 시발점이기도 한 이곳은 ‘장안에 가면 없는 게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 때 동·서양 모든 물건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각종 유명 브랜드의 의류 상점이 거리 곳곳을 차지하고 있다. 서안의 주요 관광지를 구경하기 위해서는 성벽 밖으로 나가야 한다.

현종·양귀비 사랑 나눈 화청지
당현종과 양귀비가 농염한 사랑을 나눴던 화청지는 3,000년 역사를 지닌 온천. 유독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났다는 양귀비를 위해 화청지 안에는 온천을 이용한 목욕탕이 많이 설치돼 있다. 현종 자신이 사용한 목욕탕, 양귀비가 사용한 목용탕, 그 둘이 함께 사용한 목욕탕 등이 당시의 영화로움을 그대로 보여주며 한 쪽에는 지금도 43℃온천물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화청지에 들어서면 아담한 인공 연못과 함께 그 앞에 서 있는 양귀비 석상이 먼저 눈에 들어오다. 관광객들의 단골 사진 촬영 장소인 화청지 앞 양귀비의 모습은 생전 양귀비 모습을 담아 놓은 듯 풍만함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다. 호수 앞, 겨울철 둘만의 로맨스를 위해 지은 침실 비상전에는 화청지 전체 건물 중 유독 지붕에 눈이 쌓이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화청지는 러브스토리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936년 장개석의 국민당군과 모택동의 홍군이 국공내전을 치르고 있을 때 장개석에게 불만을 품은 만주군벌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과 양호성이 국민당군의 최전선을 시찰온 장개석을 체포하여 구금한 서안사변의 현장이 바로 화청지다. 서안사변으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으며 이 사건은 중국현대사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게 된다.

병마도용 지금도 개발중
서안엔 많은 볼거리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진용박물관은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빠지지 않고 들리는 관광지. 박물관의 유명세 덕에 입구에는 축소된 토형과 여러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가득 들어차 사후에도 후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진시황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실감케 한다.
진시황릉에서 1.5Km 떨어진 진용박물관은 진시황이 자신의 사후세계를 지키기 위해 총 8,000여 개의 인형을 세워 놓은 거대한 지하 근위 군대다. 지금도 계속 개발 중인 진용박물관은 총 3개 실로 구성돼 있으며 저마다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1호실은 평균 시장은 180cm, 무게 200kg에 달하는 기병과 보병군을 주축으로 이뤄져 있으며 가장 많은 6,000여 점의 인형과 32기의 말, 8개의 전차가 세워져 있다. 2호실은 전차 병 부대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가장 발굴이 더딘 곳이다. 이 곳에 전시되고 있는 실제 크기를 반으로 축소해 만든 동마차는 당시의 섬세한 세공기술과 조형미를 전해준다.
86개의 토형이 있는 3호실은 지휘관 부대가 놓여있는 곳으로 수는 적지만 가장 값 비싸고 정교한 인형들이 전시돼 있다. 이 곳에 있는 인형들은 모두 최고급 갑옷을 입고 있으며 최근에는 최초 만들어질 당시의 색상이 잘 보존된 인형이 출토돼 관심을 끌고 있다. 3호실의 특징 중 하나는 얼굴 없는 인형이 많다는 점인데 그 이유는 가장 나중에 만들다 보니 진시황의 죽음과 함께 완성되지 못한 채 그대로 지하세계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얼굴도 없이 진시황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땅 속 어둠 속에 갇힌 인형들. 병마도용을 돌아보면 중국은 통일했지만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만은 극복하지 못한 인간 진시황의 모습과 ‘버리고 떠나기’란 두 가지 명제가 절로 떠오른다.
중국 서안=김기남 기자


중국 4대 미인 애칭도 각각
중국의 4대 미인하면 흔히 월나라의 서시와 한나라의 왕소군, 삼국시대 초선, 그리고 양귀비를 꼽는다.
이들 미인들은 그 명성에 걸맞는 여러 애칭과 미모에서 유래한 한자성어를 지니고 있는데 이중 자연도 그 아름다움에 주눅든다는 식으로 풀어 쓴 유래가 재미나다.
월나라의 절세 미인인 서시는 물 속의 물고기도 그 아름다움에 반해 가라 않는다 하여 침어라 불렸으며 한나라의 왕소군은 나는 기러기도 떨어뜨리는 미색으로 낙연이라는 애칭을 지니고 있다.
삼국시대 여포의 여인이었던 초선은 달도 부끄러워 구름 속에 숨을 만큼 아름답다는 뜻으로 폐월이라 했으며 양귀비는 거닐던 연못가의 연꽃마저 고개를 떨군다고 해서 수화라는 애칭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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