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旅行이다. 가을이 짙어가는 10월 하순의 어느 주말. 이전부터 한 번 내려오라는 남도의 지인(知人)을 만나기 위해 단출한 가방 하나 메고 순천행 버스에 몸을 맡겼다. 어디를 갈 것인지, 무엇을 볼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가을 햇살은 눈부셨다.

단장 짚고 남도기행 떠나볼까나
순천행 버스에 올랐지만 1차 목적지는 순천이 아닌 광양. 광양까지 가는 직행버스가 없기 때문에 일단 순천에 도착한 후 시외버스로 갈아 탈 요량이었다. 순천까지는 얼추 4시간이 소요됐으며, 순천에서 광양까지는 대략 40여분이 넘게 걸렸다. ‘철(鐵)의 도시’ 광양. 얼마나 삭막할까하는 짐작은 광양제철 직원들과 그 가족들, 또 관련업체 주민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면서 보기 좋게 빗나갔다. 풍성한 조경하며 잔뜩 물이 든 단풍들이 화려하진 않지만 단아한 인상을 풍겼다. 이상하리만큼 사람들의 통행이 없었는데 오히려 만추의 고즈넉함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빨간색 줄리엣. 우리의 발품을 덜어줄 애마다. 일단 허기를 채우기 위해 차머리를 돌렸는데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 데다 해가 일찍 떨어지는 바람에 사위가 어둑신해져서야 한 음식점에 도착했다. 그리 오래 달린 것도 아닌데 이미 전라남도에서 경상남도로 훌쩍 넘어와 있었다. 자리를 잡고 순대와 만두, 칼국수를 시켰는데 특히 순대맛이 특이했다. 주인장에게 물었더니 막창순대란다. 보통 순대보다 쫄깃한 맛은 떨어지지만 말랑말랑하고 고소한 게 자꾸 젓가락이 간다.

검은 밤바다엔 푸근함이­상주
든든히 배를 채우고 나오니 어둠이 더 짙어졌다. 밤바다를 보기 위해 상주해수욕장으로 핸들을 꺾었다.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에 위치한 상주해수욕장. 송림을 지나 백사장에 다다르니 칠흙같은 어둠만이 반길 뿐이다. 반달형으로 펼쳐져 있는 길이 1.5km, 너비 70(만조때)∼150m(간조때)의 비단 같은 백사장과 그 뒤로 1km에 이르는 송림이 모두 어둠에 잠겼다.
앞바다에 떠있는 세존도가 자연적인 방파제 구실을 해 물결의 일렁임조차 거의 없다. 극도의 적막감이 어깨위로 고스란히 내려앉는다. 얼마만에 보는 밤바다인가!! 물끄러미 밤바다 한가운데를 바라보니 얼굴도 손도 온통 검정물이 드는 듯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불안하다기보다 오히려 묘한 안정감과 아늑함이 느껴진다. 아뜩해지는 기분.
상주해수욕장에서 4km 동쪽 지점, 해변 고개 너머에는 또 하나의 해수욕장이 자리하고 있다. 상주해수욕장보다 울울창창한 송림과 탁 트인 바다 풍경으로 객들의 발목을 잡는다는 송정해수욕장이다. 상록수림으로 이름난 미조리와 최영 장군 사당인 무민사도 놓치기 아깝다.
남해대교를 건너 다시 광양 시내로 들어와 저녁을 먹기 전 까만 하늘을 향해 내뿜는 광양제철의 불기둥과 연기기둥을 먼발치서 봤다. 분명 공기를 탁하게 하는 주범임에 틀림없을 터인데, 두 기둥은 제철소를 어지럽게 얽어 싼 각종 철제 통로와 배관들과 어울려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던졌다. 마치 <블레이드 러너>나 <브라질>에서 묘사한 근미래의 어느 시간대에 불시착한 느낌이다.

단풍에서 신비의 약수까지­선암사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끼리 늦은 밤까지 얘기꽃을 피우는 건 당연지사. 그렇다고 다음날 행보에 지장을 받는다는 건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일. 객을 위해 소담스럽게 내놓은 아침을 한껏 맛있게 들고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조계산 기슭 남쪽에 면한 선암사(仙岩寺)로 애마를 몰았다.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년)에 아도화상이 비로암을 짓고, 신라 경문왕 원년(861년) 도선국사가 선종 9산 중 도리산문 선풍으로 지금의 선암사를 창건했다. 운암사, 용암사와 더불어 호남 3암사로 불리는데, 그 중 수찰(首刹)로서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선암사는 태고총림. 태고종은 승려들이 결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별되는데 조계종에 이어 2번째로 큰 종단이다.
선암사 반대편 조계산 북쪽 산 중턱에 자리한 승보사찰 송광사가 ‘겨울 절’이라면 선암사는 ‘여름 절’이라 부를 만하다. 절을 끼고 있는 계곡이 깊어 여름에 찾으면 좋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을의 정취가 별스럽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수령이 수백 년 되는 상수리, 동백, 단풍, 밤나무 등이 울창하고 가을단풍이 유명하다. 아닌게 아니라 단풍의 정취를 만끽하려는 행락객들로 붐벼, 선암사 입구부터 다소 수선스럽다.
선암사에는 볼거리가 많다. 우선 절 앞에 선녀들이 목욕을 하고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아취형 모양의 승선교는 보물 제400호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우니 놓치지 않으려면 유의할 일이다. 자세히 보면 기저부가 자연 암반으로 되어 있어 견고하며, 중앙부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대웅전 앞 좌우에 서 있는 삼층석탑도 보물(제395호)이다.
선암사는 겉에서 보기 보다 상당히 넓다. 경내로 들어서서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여기가 끝이지 싶다가도 옆에 난 갈래길로 돌아보면 또 다른 사찰이 나타난다. 대웅전, 팔상전, 원통전, 금동향료, 일주문 등 지방문화재 12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선암사 본찰 왼편으로 난 등산로를 따르면 17m 높이의 거대한 바위에 조각된 마애불을 볼 수 있다.
선암사를 품고 있는 조계산에는 봄철에도 와볼 일이다.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한 발 일찍 봄을 맞는 조계산은 일대에 널리 퍼져 있는 고로쇠나무로도 유명하다. 개구리가 땅껍질을 박차고 나오는 경칩을 전후해 ‘신비의 약수’라 불리는 고로쇠 수액이 흐른단다. 송광사의 흐드러진 동백은 또 어떤가!
선암사가 17세기 4대 강사로 꼽히는 함명, 경붕, 경운, 금봉스님을 비롯해 후에 엄한 법으로 불사를 일으킨 침굉스님, 19세기 큰스님으로 추앙받던 상월스님 등 걸출한 큰스님들을 배출했다는 말에 마음 한켠이 가지런해지면서 마른 침을 삼키게 된다.

푸른 융단 차밭속으로­보성
뜬금없는 남도 기행의 끝은 보성 땅에서 맞기로 했다. 그전에 잠깐 고인돌공원에 들러 머리를 식혔는데 1만7,000평 부지의 고인돌공원에서는 선사시대 문화유적지인 고인돌군을 비롯해 구석기 집터, 신석기 및 청동기 움집 6동과 선돌 등을 볼 수 있다. 고인돌공원을 싸고 흐르는 주암 호수의 정경도 만만치 않은 운치가 있다.
화순을 거쳐 보성에 이르는 29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성읍에 다다라 다시 18번 국도를 타고 약 6Km 더 가면 만나게 되는 보성 차마을. 우선 만나게 되는 건 양쪽으로 열지어 늘어선 삼나무 오솔길이다. 상주해수욕장에서 칠흑같은 어둠에 검게 물들더니 이제 녹색물이다. 녹색 기운을 잔뜩 받아 작은 연못과 정자, 찻집이 있는 아기자기한 입구를 지나니 산 전체를 깍아 만든 거대한 차밭이 버티고 섰다.
그야말로 푸른 융단! 보는 것만으로도 취하는 것 같다. 차밭과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삼나무로 인해 산림욕을 하러왔지 싶다. 녹조의 바다에서 자맥질을 한 듯 또 마치 사람이 광합성 작용을 한 듯 폐부의 공기도, 혈관 속 피도 모두 모두 녹색이지 싶다. 이른 아침에 도착하면 맑은 계곡물 소리와 새벽 안개 낀 차밭을 감상하며 오솔길을 걸을 수 있다니 그건 또 얼마나 가없는 운치를 전할 것인가!!
전남 광양·보성, 경남 상주=노중훈 기자 win@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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