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취재]제주도 트래킹을 떠나다 下
[현지취재]제주도 트래킹을 떠나다 下
  • 천소현
  • 승인 2000.11.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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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기 훈련처럼 받아들여졌던 제주도 트래킹 3박4일의 전반부는 4일째가 되자 ‘할만했어’ 혹은 ‘그 정도야’ 식의 가벼운 농담거리로 둔갑했다. 간사한 것은 마음만이 아닌지 뜨거운 샤워 한번과 ‘찜질방’처럼 뜨거웠던 민박집의 달콤한 잠으로 몸은 가볍게 회복됐고, 힘차게 우도(牛島)로 향했다.

가슴에 남은 생생한 제주 등돌에 맺힌 한은 승마로 푼다
4일째 늦은 아침의 첫 일정은 원래 우리가 야영하기로 했던 제주절물자연휴양림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이곳이 슈퍼스타 한석규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고 말하던 모 핸드폰 광고의 배경이 되었던 바로 그 곳이다.
오전의 햇빛이 300헥타르의 땅위에 빽빽한 삼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투명한 그림을 그린다.
언젠가 꼭 한번 야영을 하고 싶을 만큼 조용하고, 쾌적하다. 세면장이나 샤워장, 운동장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야영에 불편한 점을 찾을 수 없다.
이어서 일행은 정석항공관의 영상실에서 정신 없이 머리를 돌려가며 360° 서클비전을 관람했고 성읍민속마을을 방문했다. 제주도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실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성읍마을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제주도만의 독특한 생활풍속이 아니라 속사포처럼 제주방언을 쏟아내는 비바리(아가씨, 해산물을 채취하는 처녀) 가이드였다. 하지만 정작 남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것은 이 아가씨가 아니라 한아름 크기의 돌덩이였다.
‘등돌(듬돌)이라고 불리는 이 돌을 들어올리는 것이 제주도에서는 다른 마을을 통과하는 의례, 혹은 힘겨루기의 방법으로 쓰였다고 한다. 힘든 코스가 끝나서인지 뜻밖의 장소에서 모험과 도전의 정신이 되살아난 남자들은 일정이 늦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들었고 결국은 다들 돌을 잠시 꼬옥 끌어안더니 얼굴이 벌개지는 현상을 연출했을 뿐이다. 한국인 특유의 승부근성이 있어서인지, ‘등돌’에 신비한 마력이 있어서인지 재도전을 거듭하는 사람들로 이 ‘등돌’은 이제 뛰어난 관광상품이 됐다고 한다.
다음 코스는 이어도관광승마. 제주도 가서 말 한번 못타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겠지만, 우리는 말을 탔을 뿐 아니라 ‘달리기’도 했다. 우리를 태운 백마, 흑마, 배부른 암말, 걸으면서 용변보기를 즐기는 갈색말은 자전거로 성난 엉덩이의 사연을 몰라주며 빠르게 트랙을 돌았다. 이런 식의 ‘과격한’ 승마가 허용되는 곳은 이곳 이어도관광승마장 뿐이라고 한다.

우도의 갯바위에서 낚은 ‘사랑’
점심을 유명한 제주 흑돼지 불고기로 포식하고 성산항에서 15분쯤 배를 타고 우도에 내리자 우리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 봉고에 몸을 옮겨 하얀산호 민박에 도착했다.
바다를 향한 이 민박집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실로 아름다웠다. 오른쪽으로 뻗은 해안도로를 따라 시선을 멀리 던지면 우도봉의 푹 패인 등허리가 올려다 보인다. 그리고 다시 왼쪽으로 고개를 조금 돌리면 방파제 끝에 빠알간 등대가 걸려있고 한 뼘쯤 바다를 건너면 성산일출봉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번에는 왼쪽부터 서서히 고개를 돌려보자. 우리가 배를 타고 건너온 제주도의 한 가운데에 우뚝 솟은 한라산이 있고 그 주위에 크고 작은 오름들이 ‘형님’하며 어깨에 힘을 주고 도열해 있다.
이 장관을 바라보는 사이 제주도 트래킹 3박4일 여정의 3분의 2가 훌쩍 지나고 이제 마지막 밤이 남았을 뿐이다. 그 동안 우리들은 어려운 시기를 함께 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서로에 대한 정으로 성큼 가까워져 있었다. 6시간 70Km의 하이킹과, 오리털 침낭에 담요를 덮어도 따뜻해지지 않는 텐트에서의 야영, 그리고 5시간의 한라산 등반까지 함께 한 6인의 용사들은 지나치게(?) 완벽한 팀웍을 이뤘다.
우도에서의 마지막 밤은 이렇게 다져진 팀웍과 우정을 모닥불 앞에서 뜨겁게 달구는 것으로 계획됐다. 그러나 모닥불 앞에서 기울일 소주잔에 어울릴만한 안주를 마련하는 것이 우선.
민박집의 대형냉장고에 남은 식료품을 챙겨넣고 개인짐을 대충 풀고 나니 갯바위낚시의 준비도 끝났다. 대나무 낚시대를 하나씩 들고 민박집 갯바위로 내려가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피를 토하는 토막난 지렁이를 재물 삼아 고기는 잘도 잡혔다. 강태공들은 낚시대 드리우고 인생이며 사랑이며 생각도 많이 한다던데, 우도의 갯바위 낚시는 미끼를 넣기 무섭게 몰려드는 눈먼 고기들로 바쁘기만 하다.
넣으면 입질이요, 들면 고기라. 어랭이며, 자리돔, 장어까지 여러 종류의 고기들이 삽시간에 수통속에 쌓여간다. 어두워지기전에 불과 1시간도 되지 않는 낚시의 수확물은 세꼬시(생선을 뼈채 썰은 회)로 10명의 입을 즐겁게 하고 매운탕을 끊일 만큼이 됐다.
낚시에 처음 입문한 김경희씨는 해녀 출신이 아니냐는 의혹을 한 몸에 받았고, 미끼만 속속 빼먹는 영리한 고기들에 농락 당한 우리의 투어 인스트럭처 박대혁씨는 자못 표정이 심각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제주 트래킹의 하이라이트는 이 날, 낭만적인 마지막 밤이었다.
낚시가 끝나자마다 목장갑을 들고 어디론가 사라진 남자들은 맥가이버처럼 갯바위 돌을 이리저리 옮기더니 금세 모닥불을 놓을 자리를 정돈했다. 평평한 돌은 간이 의자로, 얇은 나무 판자는 식탁 대용으로 둔갑했다. 고구마와 햄, 소세지는 은박의 옷을 입고 불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마쳤으며 우리가 노획한 물고기들도 비늘을 벗고 투명한 모습으로 접시 위에서 초고추장과 동침했다.
이렇게 시작된 파이어의 하이라이트는 김경희·이 훈 부부를 위한 이벤트. ‘막내’라고 불렸던 양동혁씨가 우연히 발견한 ‘사랑석(정말 예쁜 하트모양이다)’ 하나가 이 부부에겐 결혼의 권태를 말끔히 씻어주었고, 제주도 트래킹을 위해 몇 달을 고생한 4명의 노총각 투사들에게는 좋은 짝이 생기라는 행운을 전했다.
모닥불속에서 노랗게 익은 밤고구마의 달콤함보다, ‘탁’ 소리를 지르면 벌어진 소세지의 쫄깃함보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기꺼이 몸을 희생한 작은 고기들의 고소함보다 그 밤을 맛있게 장식한 것은 사랑의 축복이었다.

우도팔경을 가슴에 담다
다음날은 전체 일정 중에 가장 바쁜 날이었다. 전날의 짜릿한 손맛을 잊지 못한 사람들은 잠 덜깬 고기들을 유혹해 아침 식단에 회를 선보이는 ‘엽기’를 연출했으며 이 트래킹 상품을 개발한 장본인인 두배로 여행사의 최형기 사장은 평소에도 먹기 힘든 소라죽을 놀라운 솜씨로 선보여 모두의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서둘러 짐을 싼 일행은 우도봉에 잠시 올랐다가 다시 제주도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도에 남긴 아쉬움을 우도팔경 유람선으로 대신했다. 관광객들은 재치가 넘치는 안내원 아저씨의 설명에 따라 파도가 날리는 갑판위에서 귀가 먹먹해지는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좌로, 우로 우르르 몰려다니며 우도의 명물, 여덟 가지 절경(牛島八景)을 감상했다.
다시 성산항에 내려 제주도의 동북쪽 해안도로를 훑기 시작한 우리는 종달리부터는 차에서 내려 가벼운 도보를 시작했다. 맛조개잡이가 가능한 체험어장을 지나, 간만에 보는 모래사장을 밝기도 하고, 물 때를 놓쳐 결국 포기했지만 문주란 자생지인 난섬까지 접근을 시도하며 한 2Km를 가뿐히 걸었다. 점심은 관광객들이 쌓아놓은 소망스런 돌탑이 빼곡한 석다원 앞의 식당에서 ‘국물맛이 끝내주는’ 시원한 칼국수를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자 시간을 더욱 빠르게 지나갔다. 세계 최장의 용암동굴인 만장굴에 들른 후 제주시내에 들어와 맛난 고등어 조림으로 저녁을 먹고 나자 이제 남은 것은 여행의 개운한 마무리를 위한 프로그램인 ‘해수 사우나’뿐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저녁 9시 비행기 안에서 다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이런 꿈을 꾸진 않았을까? 다시 한번 제주도로 트래킹을 떠나는 꿈.
제주도 글·사진=천소현 기자 joojoo@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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