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중부지방에 위치한 후에는 호치민 북쪽으로 1,050km 떨어져 있으며 면적은 67㎢, 인구는 3만명의 작은 시골 도시로 치부되기 쉽지만 베트남 어느 도시도 따라 올 수 없는 후에만의 독특함이 전세계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 불교신자 80% ··· 도시민들 근면해

호치민 국제공항을 이륙해 1시간30분이 훨씬 넘게 소요된 것 같다. 우리네의 어느 시골 작은 버스터미널과 같이 규모의 초라함보다는 단아한 멋을 풍겨내는 푸바이 공항에 도착했다.

출구를 나서자마자 전통의상인 아오자이를 입은 후에 관계자들이 고도의 첫걸음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후에는 불교신자가 80%를 차지할 만큼 불교색채가 강한 도시로 시민들의 종교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다. 특히 5시에 기상해서 이른 10시에 취침할 정도로 규칙적인 생활을 통한 근면함이 고도라는 이미지와 함께 도시 전체를 대표한다.

그러나 이 작은 도시 후에도 개방의 물결이 닿아 거리 곳곳에서 저녁 늦게까지 젊음을 불사르는 신세대들이 늘어가고 있다. 후에가 고도의 이미지를 간직한 이유는 베트남 마지막 왕정인 응웬 왕조의 도읍지였기 때문이다.

응웬 왕조는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졌던 왕조로 지금의 베트남이라는 국호 역시 응웬왕조 첫 왕인 ‘응웬 폭 안’ 스스로 ‘지아롱’ 황제로 즉위하면서 명명해 세상에 빛을 보기 시작했다.

◆ 유네스코 지정 베트남유일의 문화유적지

현재 후에는 1993년 유네스코(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베트남 유일의 역사문화유적이다.

유네스코 집행위원으로서 후에를 여러차례 방문한 아마담마타르 음보우씨는 “우아하고 시적인 건축솜씨를 자랑하는 도시”라고 이 고도를 극찬했다.

후에를 가로지르는 향강 북쪽에 위치한 후에성은 ‘지아롱’ 황제에 의해 1804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외성인 ‘낀 탄’과 내성인 ‘황 탄’ 그리고 황제의 거처인 ‘뚜 껌 탄’의 삼중 구조로 되어 있다.

궁으로 들어가는 왕궁문은 제2대 왕인 민왕 때 건설되었으며 12대 왕인 카딘왕 때 재건된 것.

돌계단 위에 2층으로 되어 있는 중국풍의 건물로 문의 입구는 3개가 있지만 중앙문은 황제가 외출할 때에만 사용되었으며 나머지 문은 신분에 따라 출입문이 달랐고 특히 왕의 권한은 용에 비유되어 철권통치가 이뤄졌다.

또 코끼리와 같은 동물들이 출입하는 문이 달랐다고 하니 철저하게 신분사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2층에는 여자는 절대로 출입할 수 없었으며 특히 북을 설치해 조선왕조의 신문고 제도와 같이 억울한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해주는 대민창구로 활용되었다.

왕궁은 전체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건물들의 명칭도 태화전 등의 한자 명칭을 사용했었으나 프랑스 식민지를 거치면서 중국문화는 많이 퇴색되었다.

왕의 거처인 현암각은 상징적으로 신성시 됐던 곳으로 바닥은 100년이 넘도록 바뀌지 않았으나 마지막 두 왕이 서구의 모던한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서구풍으로 변화되었다.

특히 현암각 마당에 있는 9개의 화로는 사이공, 하노이, 후에 등 베트남 9개 도시를 상징하며 솥에 새겨진 문양은 각 도시를 흐르고 있는 강을 상징한다. 불교국가답게 왕궁내부에는 사원이 있지만 남자와 여자가 출입하는 사원이 다른 것이 특징이다.

◆ 후에박물관 - 왕 사용물건 볼 수 있어

후에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왕이 사용했던 물건들을 접할 수 있었다. 물론 왕의 행차나 행사가 열릴 때마다 연주되었던 악기가 눈에 띄었다.

‘앗!’이라는 함성이 절로 나왔다. 베트남에서는 ‘당다’라고 불리우는 악기로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악기인 편경·편종과 똑 같은 악기가 놓여 있다.

우연치 않게 배낭여행을 하는 한국 여대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중국에서 내려와 하노이를 거쳐 후에에 도착한 지 채 하루가 안되었다는 두 여대생의 옷차림이 말이 아니었다.

신발을 보니 여정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앞으로의 일정이 더 귀에 솔깃했다.

동남아 지역을 돌아본 후 인도까지 여행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어려운 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름대로 신념을 갖고 여행에 임하는 모습이 장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편안하게 여행을 하면서 왜 이렇게 힘들까하는 마음이 들었던 내가 왠지 부끄러웠다.

눈에 들어오는 왕궁의 풍경 역시 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왕궁 전체의 70%가 프랑스와 대미 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되었다고 하니 100여년전의 수도의 위상은 찾기가 힘들다.

◆ 후에인의 삶을 보려면 동바시장으로

잠시 짬을 내 후에의 대표적인 재래 시장인 동바 시장으로 향했다. 상당히 큰 규모인 동바 시장은 후에인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살펴 볼 수 있다.

전국 곳곳에서 실려온 생필품들이 싸여있고 점포 앞에 직접 재배한 것처럼 보이는 야채들을 내놓고 판매하는 할머니들이 유난히 많다.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한 베트남 개방의 물결이 실로 느낄 수 있다.

후에의 멋은 뭐니뭐니해도 향강이다. 향강에서 보트를 타기 전 1601년에 세워진 티엔무사에 잠시 들렸다. 높이 21m가 넘는 장관의 그림자가 향강에 드리워진다.

‘행복과 하늘의 은총’을 의미한다고 하니 그 아름다움에 걸맞다. 자 이제 배를 타자. 시원스럽게 밀려나가는 배 위에서 전통음악이 공연됐다. 현악기와 타악기는 세계 공용어와 같다.

컵과 막대기를 이용한 타악기는 베트남 생활양식에서 나온 것이고 현악기는 우리 악기와 비슷한 게 많았다.

말그대로 향기가 피어나는 강으로 사이공에서 보았던 황토빛의 거친 물살과는 달리 맑은 향기가 피어나듯 물에서 반사되는 햇빛이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 중국남부 색 짙은 도시 - 호이안

자 이제 고도의 마지막 일정인 호이안으로 향한다. 호이안으로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정비되지 않은 도로를 통해 산을 넘는 일, 그것도 꼬불꼬불한 길을 말이다.

관광청 관계자는 산을 뚫는 작업을 진행중이라고 설명했다. 곳곳에 삼성, 현대의 상표가 붙은 중장비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호이안은 옛 시가지의 모습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중국과 인도, 아랍을 잇는 중계 무역 도시로 번성했다. 한때 일본인 거리도 있었지만 쇄국정책으로 쇠퇴한 후에는 화교들이 이주해와 오래된 도시의 분위기가 중국남부와 흡사했다.

너무 길에서 시간을 허비했던 것일까. 단지 몇 시간 동안 둘러보았던 호이안 구시가지 길이 아른거린다. 고도의 향기가 넘치는 후에와 호이안을 뒤로 하고 다시 호치민으로 향한다.

후에=김헌주 기자 hippo@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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