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으로 물을 튕기며 부귀영화를 누리던 양반이 나라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살이하러 갔던 삼수갑산은 남한 사람들에게 실제 존재하는 지명으로보다도 한번 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하는 험준한 오지라는 비유로 더 익숙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 하다.

도대체 삼수와 갑산은 어디인가. 지도를 펼쳐 놓고 찾아보면 어엿한 하나의 군으로 각각 나타나고 있지만 어떤 곳인지 그곳의 의미와 영상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오히려 김소월(1902-9134)의「次 岸曙先生 三水 甲山」이 우리의 무지를 조금이나마 깨우쳐줄 듯도 싶다.

三水 甲山 나 왜왔노.
三水 甲山아 어디매냐.
오고나니 險하다
아할 물도 많고 山 疊疊이라.

내 故鄕을 도로 가자
내 故鄕을 내 못 가네.
三水 甲山 멀더라
아하 獨道之難 예로구나.

三水 甲山 어디메냐?
내가 오고 내 못 가네.
不歸로다 내 故鄕을
아하 새더라면 떠가리라.(5연중 1-3연)

이 시가 발표되기는 그가 사망하던 1934년「신인문학」 11월호를 통해서였다. 소월의 스승인 안서 김억의 시 「산수 갑산」에 대한 화답시로서 씌어진 것이다. 안서는 그의 시에서 산수 갑산에 가지 못함을 안타까워한 반면에 소월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함을 한탄하고 있다. 소월은 연보나 전기를 보아서는 그가 산수 갑산에 갔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소월은 산수 갑산에 가보지 않고 위의 시를 섰다는 것인가. 그렇다고 판단하고 싶지 않다. 다음 회에 나갈 「몰마름」이란 시를 보아서 이 시가 발표되던 시기인 1925년이나 그 한 해전에 그는 이미 적어도 산수 갑산을 거쳐 무산까지 갔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논자들은 위의 시를 두고 산수 갑산은 「유배지로서의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불귀지로서의 죽음의 이미지를 갖는다」고 했다. 하지만 산수 갑산이 높고 깊기만 하고 쓸쓸하기만 한 죄인들의 절망의 땅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화전만 일궈서 봄에 씨앗만 뿌려두면 김을 매지 않고 거름을 하지 않아도 밀, 보리, 감자가 평지보다 몇 배 수확을 올릴 수 있는 천혜의 옥토인 것이다.

그만큼 원시의 성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건강한 땅인 것이다. 그 외에 호프. 아마가 지배되며 야생 인삼과 약초산지로도 유명하다. 개마고원을 이루는 고지대 변방지대이기 때문에 문화 유적은 없으나 만주족의 월강 침입을 막 위한 성터, 보루, 봉수대터가 산재해 있어 영토를 지키기 위해 선조들이 흘린 피와 넋을 기려 볼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함경남도 북청을 시발로 하여 풍산을 거쳐 우리 민족의 성지인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으로 뜻있는 이들을 영접했던 곳이기도 했다. 북청-풍산-감산-혜산-보천-삼지연-백두산에 이르는 중간지대의 역할을 해내었던 것이다.

삼수 갑산은 원래 함경남도에 속해 있었으나 1945년 북한이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새로이 생긴 양강도(兩江道-압록강과 두만강의 상류지역이라는 뜻)으로 편입되었다. 자동차가 아니가 철로로 백두산으로 가자면 함경북도 길주에서 백암을 거쳐 양강도에 도청소재지인 혜산진에 이른 백두청년선(舊 혜산서), 여기서 다시 삼지연까지 가는 백두림철선을 이용하면 된다.

<仁荷大교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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