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6시를 조금 넘긴 시간, 이스탄불 도착, 호텔에 짐을 풀기가 무섭게 다시 버스에 실린다. 홍콩에서부터 10시간이 넘는 밤비행 때문에 어지간히 멍해진 머리속에 선착장의 찬바람이 후다닥 들이닥친다. 여기가 어딘고 하니, 보스포러스 해협이다.

길을 떠난 배는 유유히 보스포러스해협을 돌아다닌다. 별 하나, 달 하나 사이좋게 어울리는 붉은 터키 국기를 펄럭이며. 이 배는 지금, 유럽에 있는 걸까, 아시아에 있는 걸까? 이스탄불은 이 보스포러스해협을 사이에 두고 두 부분으로 나뉜다. 그리 멀지도 않은 이쪽 해안과 저쪽 해안이 그 멀고도 먼 '아시아'와 '유럽'이다. 도전과 응전의 역사속에서 '서양열강'이나 '서방선진국'이니 하는 말에 휘둘려온 작은 나라의 국민이 갖는 위축감 때문인지 두 대륙을 안고 있는 이스탄불은 너무나 위대해 보인다.

바람이 쌀쌀하지만 배 옆으로 스쳐가는 풍경은 따사롭다. 둥근 돔 지붕을 머리위에 틀어올린 화려한 모스크들과 수십톤의 금과 은으로 장식했다는 돌마바흐체 궁전, 수영장이 딸린 호텔들, 언덕을 타고 층층이 올라간 별장들. 터키 전체에 6만개나 된다는 모스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제국의 수도였던 이곳 이스탄불에 몰려있다. 공화정 수립과 함께 앙카라에게 수도의 자리를 내주었지만, 제국의 영광은 여전히 지속된다.

평일 오전인데도 부두에 늘어서 낚싯대를 드리우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이유는 경제가 나빠지자 실업자들이 늘었기 때문이란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출퇴근을 하다보면 남보다 서너배 고단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보스포러스에서 낚싯대만 드리우면 '호구지책'이 마련되는 터키 실업자들의 처지는 또 얼마나 고상한가.

동서양의 보물창고 '톱카피 궁전'

이른 아침, 빛보다 한참 늦게 등장한 게으른 태양은 아시아와 유럽의 하늘을 가르며 머리 위로 올라선다. 톱가피 궁전에 들어서자 슬슬 머리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 점령이후 22명의 술탄들이 살았던 톱카피 궁전은 현재 남아 있는 궁전 중 가장 오래되고 큰 것 중 하나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화려한 궁중생활과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진귀한 유물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그 옛날의 주방을 개조해 만든 도자기 박물관은 세계에서 3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조악한 디스플레이 때문에 초라해 보이지만 여기에 전시되어 있는 1만2,000여점의 도자기는 모두 궁전에서 실제로 사용되던 것이었다. 중국의 베이징에서부터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종착지이자 유럽대륙을 가로질러 런던까지 이어지는 오리엔탈 특급열차의 출발지답게 중국, 일본뿐 아니라 유럽의 다양한 자기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아쉽게도 톱카피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86캐럿 숟가락 다이아몬드나 에머랄드 단검, 6,666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순금 촛대 등은 보지는 못했지만 은과 크리스탈의 도자기들도 못지않게 아름답다. 이 밖에도 회교 성물관에는 아호메트가 생전에 사용하던 유품들이 턱수염, 머리카락 등과 함께 전시되어 있고, 의복관에서는 점점 서양의 영향을 받아들였던 궁중 의상의 변천사를 볼 수 있다. 수학여행 온 아이들에게 '메라바'하고 인사를 건네면, 수줍은 미소를 꺼내서 보여준다.

'에레바탄사라이' 지하 저수지

건물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내려서자 갑자기 서늘한 기운 확 끼쳐온다. 532년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 황제 때 세워진 에레바탄사라이 지하 저수지다. 식수난을 해결하기 위해 19km 떨어진 벨그라드 숲에서 끌어온 물을 무려 8만톤이나 담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330여개의 기둥이 제각기 모양이 다른 이유는 주인이 없어진 고대 신전의 기둥을 재활용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이한 것은 거꾸로 혹은 옆으로 눌려있는 메두사의 머리인데 당시, 기독교의 사회에서는 사탄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기둥에 눌려 수장당했다.

터키의 명품시장 '그랜드바자르'
신기하고 볼거리 가득한 재래시장일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눈앞에 나타난 그랜드바자르는 관광객을 위한 세련된 쇼핑가다.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는 카펫제품과 일찍이 장식용으로 발달한 아름다운 타일과 도자기 제품, 그리고 유통되는 양이 세계 최다라는 금제품과 신비한 초록빛의 터키석. 마지막으로 품질은 훌륭하나 디자인은 장담할 수 없는 가죽제품들. 지붕이 덮여 있어 항상 쇼핑이 가능한 그랜드바자르의 상점의 개수는 사람에 따라 4,000개라도고 하고 6,000개가 넘는다고도 하니 한지붕 몇 가족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이스탄불 글·사진=천소현 기자 joojoo@traveltimes.co.kr
취재협조=캐세이패시픽항공 02-3112-800


사라지오스만투르크와 오늘날의 터키

지금 터키의 국토는 한반도의 3.5배 크기로 그들의 역사상 가장 작은 땅덩어리다. 전성기 때의 오스만투르크의 영토는 북부아프리카 전역, 중동지역 전체, 동부유럽과 발칸반도, 러시아 흑해 윗부분까지 펼쳐져 있었다. 1453년 오스만 왕조의 무하마드 2세가 1000년 이상 부귀영화를 누려오던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오스만투르크의 수도 '이스탄불'로 명칭을 바꾸면서 시작된 영광의 시절이었다.

누군가는 1923년 터키가 공화정을 수립하면서 오스만투르크라는 이름을 버린 것이 국가 이미지에는 큰 손실이었다고 말했다. 사실 더 이상 술탄(통치자라는 뜻의 아랍어, 오스트투르크 제국의 황제의 칭호)의 지배가 아니라 대통령이 정치를 끌고 나가는 터키의 오늘은 그 옛날의 위용에 비하면 초라하긴 하다.

올해 들어 심각한 경제 위기에 봉착한 터키의 환율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요동을 치고 있다. 몇 달 전에는 단 3시간만에 1달러에 65만이던 터키 리라가 110만으로 두배 가까이 뛰어올랐다. 그러나 가난한 것은 나라지 사람들이 아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불신이라고 하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외교적으로도 오늘날의 터키는 '친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국전쟁 출전의 댓가로 52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가맹국이 됐지만 유럽 유일의 이슬람국가라는 것과, 키프러스전쟁에 의한 그리스와의 갈등으로 유럽연합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손을 뻗어 유럽의 끄트머리를 잡고 있는 듯한 터키 국토의 모습은 유럽에 대한 터키의 일방적인 갈망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러나 제국은 사라졌지만 1000년간 쌓인 기독교의 흔적을 걷어내면서 확립한 이슬람 국가의 기틀은 인구의 99%를 차지하는 모슬림의 지지 위에서 끄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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