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하나가 불상이고 불상 한 구가 산'이라고 일컫는 낙산대불은 능운산 서벽에 위치한 세계 최대마애불상(磨崖石佛)이다. 마애불상이라 함은 암벽·구릉에 새긴 불상이나 동굴을 뚫고 그 안에 조각한 불상을 뜻한다.

당나라 현종 때(713년)부터 약 90년간에 걸쳐 만들어 놓은 낙산대불은 높이가 71m, 어깨넓이 28m에 이르며 인근의 아미산과 더불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로 지정됐다. 낙산대불이 있는 능운사까지는 청두(成都)에서 차로 3시간30분 정도. 능운산 서벽에 자리한 낙산대불까지는 300여 계단을 오르내려야하는 만만찮은 여정이다.

하지만 산에 올라서도 엄청난 크기의 낙산대불의 전면을 볼 수 없다. 다만 대불의 양 어깨 쪽으로 나있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겨우 얼굴, 가슴 등 대불의 단면을 보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그래서 대불의 전신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건너편 강에 배를 띄워서 보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중생을 거둬 살피는 듯한 부처의 은은한 눈빛은 관람객이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대불 양쪽 절벽을 깎아 만든 계단을 통해 틈틈이 올려본 낙산대불의 두상은 우거진 수풀이 마치 광배(光背: 그리스도상이나 불상의 배후에 광명을 나타낸 의장)가 둘러진 것처럼 보인다.

사천성의 선명한 적토가 두드러진 대불은 천 여 년 유구한 세월을 말해주는 푸른 이끼만 아니라면 마모 없이 잘 보존된 것 같다. 발 아래 강을 굽어보는 듯한 낙산대불의 형상 가운데 가장 눈여겨 볼 부분은 '술상을 차릴 수 있을 만큼 큼직한 발가락'도 아니고 '네 사람이 상을 펴놓고 마작을 할 수 있다'는 발톱의 크기도 아니다. 중생을 생각하는 부처의 손 모양이다.

대불이 내려다보는 이 곳은 민강, 대도하, 청의강 등 양쯔강의 지류(支流)인 세 강의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머리. 부처의 두 손바닥이 위로 향하지 않고 양 무릎에 가만히 놓여져 있는 모양은 물살이 급하고 대홍수가 잦은 낙산 일대 강의 형세를 부처의 손바닥 즉, 법력으로 눌러 막는다는 의미란다. 굵어졌던 빗줄기가 다시 가늘어진다. 이런 상황을 제외하더라도 대불의 발등에서 보는 황토물살의 세기는 퍽 위협적이다.

능운사의 또 다른 이름은 대불사. 이 사찰은 천왕전과 대웅전, 장경루, 부석건물로 이뤄진 큰 가람이다. 생생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삼신불과 18나한상은 꽤 유명하다고 한다. 대불을 둘러본 참배객들은 굵어졌다 가늘어졌다를 반복하는 빗줄기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이 피운 향이 꺼지지 않고 경내를 알싸한 향내로 채운다.

삼국지 28위를 모셔놓은 무후사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거주하면서 언어 소통의 어려움을 잘 극복했던 한국인들도 종종 힘들다며 토로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 대상이란 것들은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시작되는 서구 신화문학, 캐멀롯의 전설 같은 기사문학 그리고 성경 등이다. 서구인에게 신화나 기사문학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익힌 것이지만 동양인들에게는 처음부터 '독하게' 배우지 않는 한 이런 화제에서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기 십상이란다.

생각을 뒤집으면 우리에게는 삼국지가 있다. 문화를 공유해왔다는 측면에서 한자문화권의 일원인 한국, 일본 등에게 삼국지는 중국만의 문학이 아닌 터. 청두(成都)는 유비, 관우, 장비 그리고 제갈량으로 대표되는 촉한의 도읍지였다. 삼국지 전편을 10번 넘게 읽은 사람도 부지기수라는 데 알량한 지식을 가진 기자는 무후사에서 기가 잔뜩 죽어 가이드의 말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어 내내 안타까웠다.

촉한의 도읍지로 삼국시대 이후 번성해 왔던 청두는 이후 수·당 시대 때에는 장안, 양저우, 둔황과 같은 4대 도시였다. 청두 시내에 위치한 무후사(武侯祠)는 삼국시대 영웅호걸 가운데 제갈 량을 기리는 사당이다. 무후사라는 이름은 제갈 량의 시호인 충무후(忠侯祠)에서 유래됐다.
유비의 묘인 한소열묘(漢昭烈廟) 옆에 따로 세워졌던 무후사는 명나라 초인 14세기 말 한소열묘와 합쳐졌다. 그래서 이곳의 정식명칭은 한소열묘이다.

하지만 주군을 뛰어넘는 제갈 량의 지략과 충심을 아낀 후세 사람들은 계속 무후사로 부르고 있다. 그래서 청두 시내에는 한소열모라는 정식 명칭이 아닌 무후사로 기재된 표지판이 있을 뿐이다. 무후사 입구에는 제갈 공명을 칭송하는 기념비 6개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당비(唐碑)다. 또한 촉한 시대에 유비를 받들던 문·무관 28인의 유비전(劉備殿) 안에는 넉넉한 표정의 유비상이 서 있다.

유비전 뒤로 제갈량전이 자리한다. 사당의 문이 많으면 많을수록, 문턱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지위가 높은 것을 의미하는데, 제갈 량 전의 문은 무려 17개에 달한다고 하며 문턱의 높이역시 무릎 정도라고. 유비의 묘는 왕릉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무덤이다. 또 황제와 그의 신하의 사당이 같이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도 한다. 한 나라를 건설하고 숱한 영웅들의 받듦을 받은 왕이었지만 그의 묘는 기이할 만큼 작은 편이다. 높이 12m, 둘레 180m에 불과한 그의 묘는 도굴꾼에 의해 침범되지 않은 유일한 황제의 능이라고 한다.

중국 청두, 낙산 글·사진=임송희 기자 saesongi@traveltimes.co.kr
취재협조=(주)차이나로드항공 02-774-6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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