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를 즐겨 본다. 바쁘면 바쁜 시간을 쪼개서라도 극장을 찾는다. 내게 영화감상은 책 읽기와 마찬가지로 ‘후~’하고 한 호흡을 내쉬는 쉼표와도 같기 때문이며, 잠시라도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물리적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게 올해 어떤 영화를 가장 인상적으로 보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하지 않고 프랑스 실루엣 만화영화 <프린스 & 프린세스>를 꼽는다.

하는 일이 가닥을 찾을 수 없는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키며, 사람들과의 관계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마음은 너덜너덜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던 어느 쌀쌀한 봄날 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발길은 나도 모르게 극장으로 가고 있었고, 어둠 속에서 겨우 자리를 찾은 나는 고단한 몸과 마음을 의자 깊숙이 들이 밀었다.

실루엣 애니메이션이라 피로가 쌓인 내 눈엔 흑백에 가까운 화면이 현란하지 않아 좋았다. 반쯤 눈을 감은 채 영화를 보고 있던 나는, 그러나 여러 개의 작은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점점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았으며 얼굴엔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지고 있음도 느낄 수 있었다.

이 영화에서 내가 친구들에게 즐겨 얘기해 주는 에피소드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옛날 프랑스 어느 지역에 조그만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의 변방에 사람들이 ‘마녀의 城’으로 부르는 높은 성이 있었는데 왕은 국민들에게 “누구든 마녀의 성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은 내 딸과 결혼시킨다”는, 만화영화다운 국가적인 제안을 하게 된다.

물론 내로라하는 명문가의 용감무쌍한 기사들이 화약과 대포로 중무장을 하고 창을 높이 치켜들며 마녀의 성을 공략하려 했지만 번번이 참패하고야 만다. 이러던 중, 매번 후보자 기사가 ‘출정’할 때마다 높은 나무에 올라 잘생긴 용감한 기사들의 행진을 보곤 하던 한 청년이 마을 사람들에게 “이번엔 내가 가보겠다”고 소리친다.

아무런 무기도 갖지 않은 맨손의 연약하기 짝이 없는 청년이 마을 사람들에게 미더움을 주었을 리 없다. 그러나 사람들의 비웃음을 뒤로 한 채 청년은 마녀의 성에 이르러 굳게 닫힌 높은 성문을 노크한다. “나는 이 마을에 사는 청년으로 당신의 집을 구경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문 좀 열어 주세요.” 압권은 바로 이 다음 장면이다.

이렇듯 평범하고도 정중한 상식적인 부탁(asking)에 ‘마녀’로 불리는 그 성의 주인은 단단한 문을 스르르 열어주는 것이다. 문이 열리자 청년의 눈에는 무시무시하게 생겼을 것 같은 마녀의 얼굴이 아니라, 여느 동네 사람과 다름없는 평범한 여인의 얼굴이 보인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편견을 통쾌하게 깨트리는 순간이다) 그러자 마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문도 모르게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 공격에 대응해야만 했지요. 이 성에 들어오기 위해 내게 허락(permission)을 구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지극히, 너무나도 지당한 이 대화는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놀라고 있다는 자신에 나는 다시 놀라고 말았다. 이 평범한 상식적인 대화가 충격으로 다가올 정도로 나는 그동안 비상식적인 현상과 몰상식한 관계 속에서 허우적대며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평범하고 상식적인 것의 신선함과 아름다움을 이 영화는 작은 에피소드로 메가톤급의 감동을 선물한 것이다.

나는 이 영화의 장면을 이따금 떠올린다. 크고 작은 일을 하면서 잘 된 일은 남의 공으로 돌리고 잘못 된 일은 내 탓으로 돌리는 태도를 지키는데 주저함이 없었던가? 나도 모르는 새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을까? 나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상식적인가? 그리고 이 모든 질문으로부터 나는 과연 자유로운가?

강문숙 홍보대행사 맥스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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