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풍습에 혼례 때 신랑은 사모관대를 하고 신부는 족두리와 화관을 쓰는 것은 그 날만은 누구나 왕자와 공주가 됨을 의미한다. 서양에서 결혼식 때 신랑은 연미복이나 턱시도를 입고 신부는 하얀 웨딩 드레스를 입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호텔이 호화로운 것은 누구나 여행할 때만은 귀족이 된다는 뜻이다.

유럽에는 현대화라는 시류에 영합하지 않은 채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운영방식을 고집하는 토종호텔들이 많다. 그런 호텔에 묵으면 현대식 초호화 호텔에 머물 때보다 더 운치 있게 느껴진다. 나는 우리나라 토종호텔의 대표격으로는 충무관광호텔을 꼽는다. 한때는 내노라하는 최고급 호텔이었는데 이유야 어쨋든 현재도 옛날과 변한 게 없어 뒤쳐진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런 점이 모든 것이 빨리 변하는 우리 사회에서 전통으로 느껴진다.

지방에 있는 호텔로는 귀빈도 많이 다녀간 편이라 나름대로의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박대통령이 머물렀으며,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기 전 외부와 두절한 채 대통령으로서 마지막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대통령들이 머물렀던 로열 스위트룸 301호의 주물로 뜬 큼직한 마패 열쇠고리는 첨단 카드 키와는 달리 그 자체가 하나의 골동품이다.

우리나라의 현대적인 체인 호텔 중에서는 경주 힐튼호텔을 좋아한다. 현대적 호텔이면서도 한국풍이 많이 가미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힐튼호텔임을 알리는 입구의 영문 로고도 자그마한 한국식 석축 위에 올려놓아져 소박한 느낌을 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호텔을 편안히 감싸고 있는 소나무 숲과 대숲. 경주 힐튼은 주위의 자연과 자연스레 맞닿아 한국적 조경의 전통을 수용한다. 로비에 들어서면 6개의 커다란 격자 문양이 손님을 맞는 것도 특색이 있다. 객실 324개 중에는 2개의 한식 스위트 룸과 13개의 온돌방이 있다. 2층 객실들에는 작은 한국식 정원이 딸려 있다.

경주 힐튼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호텔 안팎을 장식하고 있는 미술품들이다. 후안 미로의 석판화 ‘달을 인도하는 여인’을 비롯하여 폴란드 출생의 독일화가 폴케 지그마의 ‘황제가 하사한 비단 스카프’, 로비 좌우에 남녀로 쌍을 이뤄 놓여 있는 채드윅 린의 청동조각 ‘다이너몬드’ 등. 1층 로비 라운지나 ‘레이크사이드 카페’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면 여인과 코뿔소의 청동 조상들, 단순변형 처리되어 우스꽝스런 포즈와 표정을 짓고 있는 인체 석상들이 놓여 있어 눈을 즐겁게 한다. 세계의 유수호텔들도 장식비를 절감하기 위해 값싼 예술품과 복사품을 진열하기 마련이지만 경주 힐튼의 미술품은 거의가 오리지널들이다.

미술품 애호가라면 작품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만끽한다. 경주 힐튼은 호텔 자체만으로도 가히 갤러리라 할 수 있지만 옆에 있는 국제 규모의 선재미술관은 갤러리의 영역을 연장시킨다. 지난 11월에 갔을 때에도 우리나라의 원로화가인 윤형근과 중진 조각가인 심문섭 초대전이 열리고 있어 안복을 누렸다.

경주 힐튼에서 만추의 단풍든 산과 평화스런 보문호를 보며 가을 정취에 흠뻑 젖었다. 호텔이 고객을 감동시키는데는 반드시 초현대적이고 빠른 개보수 활동만이 전부는 아니다. 개성과 전통이 오랜 감동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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