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대 금광의 발견은 호주의 사회와 경제발전의 단계를 뒤흔들어 놓은 대사건이었다. 멜버른에서 북동쪽으로 2시간 정도 올라가면 당시 골드 러쉬의 주무대인 발라랏(Ballarat)에 도착한다.

이 곳에 위치한 소버린 힐(Sovereign Hill)은 그런 세월의 어느 하루를 붙잡아 놓은 듯 당시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재현해 놓은 야외 박물관이다. 한여름 찌는 듯한 더위에도 서부극에서 본 듯한 부풀린 스커트와 블라우스, 그리고 차양이 넓은 레이스 모자를 쓴 여인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마차가 지나가고 광부들이 분주히 작업을 하고 있다. 신기한 것은 이들이 대부분 자원봉사자라는 것. 어색한 구석 하나 없이 다들 자기 역할에 충실한 모습이 정말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한 기분이다.

소버린 힐은 1854~1861년 사이의 실제 금광촌과 역사교육, 체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초기 금광촌’에는 사금을 채취할 수 있는 도구와 기계들이 설치되어 있고 채취한 금은 가져갈 수 있기 때문에 모두들 팔다리를 걷어붙이고 어린아이들까지 총동원하여 채를 흔들어 보지만 역시 걸러지는 건 자갈과 모래뿐이다.

‘중국인 마을’은 1859년에 난폭한 유럽 사람들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곳이며 ‘금광 박물관’ ‘지하터널’ ‘제과공장’ ‘가구공장’ 등은 마을의 발달상을 볼 수 있다.

특히 어둡고 좁은 통로로 만들어진 갱도에서는 골드러쉬를 쫓아 호주로 건너온 두 중국 형제의 모험이 영상을 통해 상영되고 있다. 이 밖에도 베이커리, 우체국, 은행, 서점, 선물가게, 휴게소, 커피숍, 피크닉 장소들이 구비되어 있고 관광객들은 가이드 관광과 마차 타기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소버린 힐은 내외국인을 불문하고 호주의 역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방문하는 장소다. 한국 관광객들의 방문이 많지 않았는데도 친절한 한글 안내서를 구비하고 있는 이유도 한국 유학생들의 방문이 많았기 때문이다.

방학이 되면 어린 자녀들에게 조상들의 생활과 문화를 알려 주려는 가족 방문객들이 줄을 잇는다. 또 중국 관광객들에게 소버린 힐은 빅토리아 방문의 첫 번째 이유다. 그들은 소버린 힐에서 조상들의 고달픈 이민사를 둘러보고 멜버른의 차이나타운을 방문한다.

하지만 골드 러쉬와는 무관한 한국인들에게도 소버린 힐은 서부극에 나올만한 거리 풍경과 생활들을 직접 체험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사금채취나 금괴제작시연 등은 ‘일확천금’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에게도 잘 어울리는 프로그램이다.

이런 점에서 그레이트 오션 로드, 필립 아일랜드와 더불어 소버린 힐은 빅토리아 패키지 상품에서 빠지지 않는 코스다. 최근에는 한국 시장에 대한 빅토리아관광청의 지원이 활발해진데다가 랜드사를 중심으로 한 상품 개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멜버른 지역에 대한 전망은 매우 밝은 편이다.

빅토리아주관광청은 대만지사를 통해 한국 시장을 총괄하지만 여행업계와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한국어 헬프데스크를 운영하고 있다. 멜버른에 대한 문의사항이나 필요한 자료들, 혹은 영어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을 경우 헬프데스크의 이메일을 통해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다. victoriatour@korea.com
Sovereign Hill Gold Mining Township 61-3-5331-1944

남십자성위에 흘린 피

저녁이 되면 소버린 힐은 울긋불긋 조명을 발하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남십자성위에 흘린 피’라는 제목의 공연이 시작되기 때문.

남십자성위에 흘린 피는 호주 역사상 유일한 무장 반란에 대한 이야기다. 공연이 시작되면 60에이커의 소버린 힐은 모두 공연의 무대로 변모한다. 하지만 이 극에 등장하는 연기자를 단 한명뿐. 장소를 이동하며 공연을 관람하는 동안 모든 음악과 목소리는 무선 헤드폰을 통해 듣게 된다.

공연의 1부는 극장에서의 유레카 스토리에 대한 소개로 시작된다. 1854년 당시 빅토리아주 금광의 광부들은 부패한 정부의 관리들에게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허가증이 없이는 금을 캐지 못했을 뿐 아니라 광부들은 투표권도 없었고 의회에는 그들의 대표도 없었다.

2부의 무대는 금광이다. 여기선 초창기 금광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광부들이 금광을 파는 소리에 이어 불법 주류를 판매하거나 물이 차오르는 갱의 모습, 기마경찰이 허가증을 수색하는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3부의 무대는 유레카의 광막이라고 불리는 프리트레이드 호텔이다. 호텔 주인과 광부 젊은이의 사소한 시비끝에 젊은이가 살해되면서 촉발된 정부와 광부들의 갈등이 발생한다. 광부들을 정부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감행하지만 결국 1854년 12월3일 일요일 새벽을 틈탄 정부군의 기습에 무너지고 만다.

이 격돌에서 많은 광부들이 체포되고 유레카는 막을 내렸지만 후세 사람들은 이 항쟁을 ‘승리’로 기억하고 있다. 정부는 광부들을 전원 석방했을뿐 아니라 금광 허가증은 폐지되고 광부들은 투표권을 획득하게 됐다.

이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일행은 아담하고 조용한 ‘소버린 힐 로지’에 여장을 풀고 뜰에 모여 앉았다. 어둠이 내린 뒤에도 담장 너머 소버린의 하늘은 계속 소란스럽다.

고장난 사이키 조명처럼 구름 낀 하늘에서는 마른벼락이 한 시간 이상 섬광을 번쩍이고 소버린에서 새어 나오는 조명까지 담장을 넘어 뜰로 침범해 들어온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총총히 박힌 별들은 저마다 또렷한 밝기를 뽐내고 지평선 가까이로 내려앉아 있는 남십자성은 유난히 더 반짝인다.

멜버른 차이나타운

1851년 금광이 발견되자 수 많은 중국인들이 빅토리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적은 숫자였지만 갑자기 불어나기 시작한 중국인들의 공동체는 멜버른의 리틀 브룩 스트리트에 자리를 잡고 채금 갱부들을 위한 음식과 장비, 의약품 등을 거래했다. 1860년대들어 중국인 자치회는 회의실을 만들기 위해 토지를 구입했고 20세기 초반까지 차이나타운은 계속 성장했다.

그 후 금광이 고갈되자 잔류 중국인들은 멜버른의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더욱 모여들어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하기 시작했고 유럽의 정착민들은 이에 대한 원망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후 불평등한 노동법과 1901년부터의 백호주의 정책은 차이나타운에 암흑기를 가져와 인구가 점차 줄어들었지만 1947년 정부의 이민법 완화를 계기로 차이나타운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지금은 멜버른 교외로 세력을 뻗쳐나가 리틀 브룩 스트리트에서 스완스톤 스트리트, 스프링 스트리트까지 범위를 넓혔으며 유명한 레스토랑들이 자리잡은 멜버른의 명소가 되었다.

호주 빅토리아주=천소현 기자 joojoo@traveltimes.co.kr
취재협조=호주빅토리아주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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