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든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희미해지기 마련이지만 정말 가슴 뭉클했던 기억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새록새록 그 파장이 깊어지기도 한다. 올 한해 한국인들의 최고 빅뉴스는 한국팀의 월드컵 4강 진출과 거리 응원의 열기였음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벌써 반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이태원, 동대문에는 붉은 악마 티셔츠를 판매하고 있고, 상암경기장에서 경기 재방송을 보면서 망년회를 가지는 회사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전설을 현실로 만들어 준 대표팀과 18개월 동안 함께 했던 감독 구스 히딩크에 대한 국민적인 사랑은 아직 유효하다.

월드컵의 신화가 진행되는 동안 히딩크의 고향, 네덜란드 동부의 작은 마을 파사펠트에도 새로운 ‘한국’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언론을 통해 히딩크의 고향과 가족들(80대의 노부모가 아직 이 곳에 살고 있다)이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이 곳을 찾는 한국인의 발걸음도 부쩍 늘어났다. 한국 사람이라고는 본 적도 없을 이 작은 마을에 7월부터 하루평균 40명씩 관광객들의 행렬이 이어졌다고 한다.

‘파사펠트는 히딩크의 고향입니다’

마을입구의 안내 표지판은 파사펠트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또 상점 유리창에 붙은 태극기 포스터에는 ‘파사펠트는 한국을 환영합니다(Varsseveld Groet Zuid-Korea)’라는 글자가 씌여 있다. 이 곳이 히딩크의 마을이라는 것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아직도 히딩크 타령이냐’ 혹은 기껏 히딩크의 생가를 보기 위해 열시간이 넘게 날아서 거기까지 가느냐고 물을 수 있지만, 대마초 냄새 자욱한 암스텔담의 홍등가를 몰려다니며 라이브쇼를 보는 것보다는 낮지 않으냐고 되묻고 싶다.

암스테르담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 거리인 파사펠트는 중상층이 모여사는 작을 시골 마을로 월드컵과 히딩크가 아니었다면 전혀 주목받을 이유가 없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이 시골마을에서 받는 환대와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한국어, 태극기는 가슴에 묘한 파장을 일으킨다. 이 마을의 흙이 2유료화에 상품화되고 천연 오일을 함유한 히딩크 치즈도 등장했다고 한다.

때늦은 점심은 구스 히딩크(Guus Hiddink)가 고향에 오면 자주 찾는다는 레스토랑 ‘플롱(De Ploeg, 쟁기라는 뜻)’에서 먹었다. 스프와 빵, 생선과 샐러드로 이루어진 간단한 뷔페지만 스프의 맛이 ‘예술’이다. 맛이 너무나 익숙한 것이 알고보니 한국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고춧가루를 넣어 얼큰하게 끊인 무우국이다.

또박또박 한글간판 히딩크 박물관

레스토랑 오른쪽 뒷건물의 히딩크 박물관 ‘구지움(Guuseum)’은 아직 개관 준비 중이다. 히딩크 자신이 바빠서 진도가 더딘 것이라는데 또박또박 한국말로 ‘히딩크 박물관’이라고 씌여 있는 붉은 간판이 인상적이다. 박물관이라기 보다는 작은 상점같은 쇼윈도에는 언제 보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히딩크와 거리 응원단의 사진, 그리고 히딩크의 흔적들이 빼곡하다.

가로의 폭이 좁고 집과 집 사이가 바로 붙어 있는 대도시의 옛날 주택들과 달리 이 곳의 집들은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지어진 전원주택이다. 주택가 뒤로 엔젤이라는 이름의 예쁜 풍차도 있다. 정성스레 꾸민 정원을 통과해 낮고 아담한 집으로 하교길의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사라진다.

히딩크의 생가 앞 푯말에는 ‘히딩크는 형제 다섯 중 세번째 아들로 태어난 12살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고 1946에서 1958년까지 이 집 뒷마당에서 축구를 했다’고 적혀 있다. 똑같이 생긴 두 채의 집 중에서 왼쪽의 것이 그의 생각이며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10길더 플레이어’

사실 이 곳 사람들에게 히딩크는 일개 프로축구팀의 감독일 뿐이다. 하지만 히딩크의 선수시절 그를 지역팀의 선수로 스카웃 하기 위해 주민들이 10길더씩 모금 운동을 했을 정도로 그는 이 곳에서 사랑받고 인정받는 스포츠맨이다. 그래서 한 때 그의 별명은 ‘10길더 플레이어’였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한눈에도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어 주거나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히딩크’를 외치는 사람도 있고, ‘코리아’라고 불러보는 사람도 있다. 단체로 몰려다니며 남의 집 앞을 기웃거리는 무례도 기꺼이 참아 준다.

히딩크가 자주 간다는 중국 식당(富興酒接)에서는 히딩크 마을의 주말 마차 투어 프로그램(17.5유료화)을 주선하고 식사시 히딩크 사진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 유리창에는 태극기 포스터를 비롯해 이 곳을 방문한 한국 관광객들의 사진이 빼곡히 붙어 있다.

현재 히딩크가 재직 중인 네덜란드의 축구팀 PSV. 에인트호벤(Eindhoven)팀의 연습구장이 이곳에서 멀지 않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그를 직접 볼 수도 있다고 한다. 마침 일요일이라 텅 빈 운동장을 스쳐 지나가야 했지만 한국사람들이라면 사진도 같이 찍어주고 사인도 곧잘 해준다고 한다.

점점 한국인들의 방문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년에는 히딩크 마을과 자매도시를 맺은 전남 강진(제주도에 표류한 하멜은 강진, 여수 등지에서 억류되어 14년간 살았다)이 하멜 표류 350주년(1653년 표류)을 기념해 양 지역에서 여러 가지 이벤트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하니 한번 맺은 인연은 쉬이 끊기지 않을 모양이다.

하얀 마을 ‘톤’

벨기에를 떠나 네덜란드 히딩크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버스로 3시간 이상을 달려야 한다. 하지만 버스 기사 피터는 예정에 없이 ‘톤(Thorn)’이라는 작은 마을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 곳은 집들이 모두 하얗게 칠해진 조용하고 깨끗한 시골마을이다. 오래된 가옥들을 손보면서 모두 하얀색으로 칠하기로 한 것이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흑백사진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차분해진다. 작은 돌이 깔린 도로를 중심으로 검정색으로 포인트를 준 하얀집들은 벽에 각종 문양으로 멋을 냈다. 하늘은 우울한 회색빛이고 겨울 나무들은 앙상하지만 하얀 마을 톤은 숭고해 보인다. 성당 앞 묘지의 화려한 꽃들은 이 마을의 무채색 풍경과 대조를 이루며 아름다움을 뽐낸다.

장기 여행자가 아니라면 좀처럼 찾지 못할 마을이지만 여름이면 일본 관광객들의 단체 방문이 많다고 한다. 인적이 드문 마을을 잠시 서성이다가 기사 피터가 타준 홍차에 몸을 녹여본다. 차가운 바람속에 고즈넉한 외로움이 밀려온다.

네덜란드 글·사진=천소현 기자 joojoo@traveltimes.co.kr
취재협조=KLM네덜란드항공 02-733-7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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