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안연이 공자에게 인(仁)에 대해 물었다. 이에 공자는 “자신을 이기고 예(禮)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 극기(克己)란 자기 억제이며 복례(復禮)는 예에 부합되지 않은 언행을 예의 원칙에 부합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루라도 극기복례를 이룬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어진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답했다. 안연은 한걸음 더 나아가 “극기복례는 무엇을 뜻합니까?”하고 물었다. 공자는 답했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나아가지 말라. 인의 원칙에 부합되는 사람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면에서 예의 범위를 넘어서는 안된다”. 공자의 사상에 얽힌 유명한 일화이다.

공자는 이곳에서...仁이 무엇이더냐”

유교문화 발상지 … 도시 곳곳 공자 ‘발자취’
공묘·공부·공림(三孔)은 역사문화관광 성지

산둥성 취푸시(曲阜)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유명한 사상자이자 유교 창시자인 공자의 고향이다. 이 곳은 공자와 맹자의 유교문화 발상지로 중국 24개 역사문화명성지역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옛 노나라의 영역이었던 취푸에는 곳곳에서 공자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는 많은 문물고적이 남아 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공묘(孔廟)와 공부(孔府), 공림(孔林). ‘삼공(三孔)’이라고도 불리는 이들 유적지는 세계적으로 흔히 볼 수 없는 역사 문화관광 성지로 꼽힌다.

공묘는 공자의 제를 드리는 사당으로 공자 사후 1년(기원전 480년)에 노나라 시절 애공(哀公)이 처음 의관을 안치해 놓고 제를 지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역대의 황제들이 기부나 희사를 계속해 명·청대를 거치며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됐다. 지금의 공묘는 총 면적 22만㎡ 규모의 전체 건물 방 수만 460여개에 달할 정도. 이만하면 왠만한 황궁에 버금간다. 베이징의 자금성, 태산의 대묘와 더불어 중국 3대 궁전 건축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 곳에는 공자의 위상을 가늠케 해주는 진귀한 조각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명나라 때 건조된 금성옥진방에는 조천후라는 괴물상이 조각돼 있는데 이는 당시 지방제후들에게만 허락된 것으로 역대 황제들이 얼마나 공자를 존중했는지를 잘 나타내 준다.

또 공묘의 본적인 대성전에는 19개의 기둥에 구슬을 물고 휘감은 두 마리의 용이 조각돼 있다. 기교한 조각술로 인해 진짜 용이 기둥을 감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만큼 정교하다. 이 조각도 원래는 황제의 궁전에만 장식할 수 있는 것으로 그 만큼 공자는 학문의 황제로 중국 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성인(聖人)임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이 외에 공묘에서는 공자가 직접 심었다는 수목과 공자의 일생이 조각된 120매의 석각화, 청의 강희제가 북경의 서산에서부터 운반해 왔다는 65m크기의 비석 등을 감상할 수 있다.

공묘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공부는 역대 공자의 자손이 살던 저택과 관공서의 기능을 함께 갖고 있던 곳이다. 송나라 인종 시대에 세워져 여러 번의 개축을 거친 뒤 청대에 대규모로 다시 세워졌다.

공부는 중국 봉건 사회의 전형적인 귀족 장원으로 400여 개의 방이 갖춰진 웅대하고 화려한 건물이다. 공자의 적장손 후손이 살던 곳으로 당시 공씨 가문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한다.

저택과 관공서가 나뉘어진 중부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가묘가 자리잡고 있으며 서쪽은 연성공이 책을 읽고 시를 짓는 곳으로 쓰였다고 한다. 남북의 꽃 정원은 손님들을 대접했던 곳이다.

예전에 성린(聖林)이라고 불렸던 공림은 공자와 그 후손들의 묘가 모여 있는 곳으로 세계 최대의 씨족 묘지이기도 하다. 초기 공림의 규모는 3000여 평에 불과했지만 이후 역대 황제들이 공자의 후손들에게 토지를 주면서 현재 20㏊에 달하는 광대한 삼림지대로 변모했다. 주위의 담의 길이만 7km로 공림내에는 2만 그루 정도의 오래된 나무들이 무성한 숲길을 조성하고 있다.

공자의 묘는 공림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과 남쪽으로 각각 아들 공리와 손자 공의 묘가 있다. 현존하는 공자의 묘비는 59대손 언진이 새로 세운 것으로 원나라 무종황제가 진봉한 ‘대성진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시호가 적혀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공자에게 내려진 가장 의미 깊은 시호이며, 최고의 성인으로 문자의 이치를 백성들에게까지 베풀어준 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묘비의 비제에 얽힌 일화 중 하나로 청나라 시대 어느 왕이 공자의 묘를 참배하러 왔다가 임금왕 자가 새겨진 것을 문제 삼아 그 앞에 제단을 쌓아 아래 획을 보이지 않게 했다는 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직 그 단은 헐리지 않아 언뜻 보면 ‘왕(王)’자를 ‘간(干)’자로 보기 쉽다.

아직까지도 공자의 후손이 사망하면 선별해 공림 경내에 묘를 쓰도록 허락하고 있지만, 77대 종손인 공덕성이 1949년 가족과 함께 대만으로 피신함에 따라 종손의 묘는 거의 대가 끊긴 상태다. 곳곳에 우거진 녹음과 다양한 규모의 묘와 비석들이 보기 드문 관광거리를 제공해 준다. 걷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므로 출입구에서 자전거를 빌려 관광하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중국 태산 글·사진=정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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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러스 알파

★ 단순한 유적 관람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떠나기 전 약간의 공부를 하고 오는 것이 좋다. 알고 보는 것이 관광객들에게도 훨씬 의미있고 알찬 관광이 될 것이다.
★ 저녁에는 거리에서 야시장이 열려 포장마차 등이 즐비하다. 하지만 너무 값싼 물가만을 생각하다면 금물. 의외로 바가지를 쓰고 오는 경우가 많아 사전에 값을 흥정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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