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기로 빚어낸 전율의 예술

배낭 초보자의 ‘유럽 박물관 기행’ ③

스위스 로잔은 그다지 큰 도시가 아니라 걸어서 다 돌아볼 수 있다. 버스나 전철을 타기보다 천천히 걷다보면 반나절이면 구시가에서 호반까지 돌아볼 수 있다. 스포츠에 관심이 있다면 1896년 아테네 대회부터 올림픽 기념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올림픽 박물관을 돌아볼만하다. 호반에 면해 있어 산책하기도 좋은 코스다. 하지만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다면 구시가의 끝에 있는 알 부뤼트(Art Brut) 미술관을 찾아보자.

그곳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예술가들의 작품이 있다. 아이가 그린 듯한, 피카소보다 더한 추상화된 이미지들은 낯설면서도 이상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작품이라기보다는 원시 부족의 주술 도구처럼 느껴진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다듬고 못질해서 만든 조형물 앞에선 할 말을 잃는다.

이 작품들은 정신분열증 같은 정신병력을 지닌 사람, 감옥을 들락거린 사람, ‘영혼’에 빠진 사람, 노년에 홀로 그림을 시작한 사람들의 작품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은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예술성과는 거리가 먼 독특한 세계를 갖고 있다.

진 듀뷔페(Jean Duvuffet)라는 프랑스 화가는 1945년 처음 베른과 로잔에서 이들 환자들의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거기에는 기존 화풍이나 예술과는 전혀 다른 생생함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작품을 수집하고 전시하는데 매달렸다. 그 결과 ‘알 부뤼트’ 미술관이 탄생한 것이다. 이 미술관은 배낭여행객의 성경인 론리 플래닛에서도 꼭 들를만한 곳으로 추천하고 있다.

입장료는 6프랑이고 월요일은 휴관이다. 관람시간도 11시부터 6시까지 짧은 편이고 실내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미술관의 외관은 마치 가정집처럼 평범하고 단순하다. 하지만 들어서는 순간부터 전혀 다른 의식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아는 예술과는 다른 ‘오싹한’ 예술성, 바로 진 듀뷔페가 보았던 예술성이 우리 안에서 꿈틀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누구에게나 어떤 대상에게 뿜어야 하는 열정이 있다면, 그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사회의 간섭없이 오로지 그 열정들만을 담은 작품들이다.

영어로 이 미술관을 ‘아웃사이더 아트(Outsider Art)’라고 부르는 것이 이해될 듯하다.


<호수의 ‘시옹성'>

알 부뤼트의 열정에 사로잡힌 마음은 마테호른의 빙설이 보이는 레만호에 다다르면 풀린다. 로잔에서 배를 타고 30분이면 갈 수 있는 휴양지인 부베에는 중세에 통행료를 징수했던 시옹성이 있다.
호숫가에 돌출되어 있어 마치 성이 호수에 뜬 것처럼 보인다. 시옹성 매표소에서는 한글 안내문을 나눠준다. 방번호를 따라 이동하면서 방에 대한 설명을 보면 비슷해 보이는 각 방마다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 관광지인 고궁에도 동선을 따라 안내하는 이런 안내장이 있다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궁궐지킴이’들이 항상 지킬 수는 없지 않은가.


<마테호른이 손에 잡힐 듯한 체르마트>

레만호에서 아득히 보이는 마테호른은 알파니스트들이 정복하고 싶어하는 꿈의 봉우리다. 로잔에서 기차로 두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체르마트는 마테호른을 비롯한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파노라마로 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만년설 위에서 사시사철 스키를 탈 수 있어 스키어들로 연일 북적인다. 체르마트는 휘발류 차량 출입 금지 리조트다. 만년설을 보호하고 공해가 생기지 않도록 모든 차는 전기로 움직인다.

체르마트에 묵게 된다면 밤에 창밖을 안보고 그냥 자거나 아침 산책을 안한다면 평생 다시 못볼 절경을 놓치게 된다. 밤에는 베란다에 서면 마테호른 봉우리 옆으로 둥근 달이 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체르마트의 거의 모든 호텔이 마테호른 봉우리를 볼 수 있는 방향으로 서있다. 동트기 전 산책을 나가면 붉은 태양이 마테호른의 깍아지른 절벽 꼭대기를 붉게 물들이고 또다른 봉우리가 그 아래로 짙게 그림자를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새해 아침 동해바다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는 것 같다.

산악열차로 고르너그라트로 오르면 빙설의 절경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남녀노소 스키어들 틈에 달랑 맨몸으로 카메라만 들고 가기란 조금 억울하기도 하다. 스키장 이용권은 장기체류자들을 대상으로 판매하는데 휴가가 긴 외국인들에게는 좋지만 바쁜 일정으로 길어야 2~3일 머무는 한국인 관광객으로서는 손해다. 그래서 스위스 관광청이 한국인 관광객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산악열차가 멈추는 중간 중간에는 초보자들을 위한 스키캠프가 열리고, 열차의 종점인 고르너그라트에도 스키어들로 가득하다. 아직 어린 소년들도 미끄러지며 내려가는 모습이 부럽기만 하다.

스키를 탈 수 없다면 눈과 마음으로 즐기면 된다. 산장 휴게실 뒤쪽의 전망대에서 한바퀴 돌면 말 그대로 알프스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안내판에는 각 봉우리의 이름이 써 있다. 단, 전망대까지 쌓인 눈이 단단해 보이지만 어느 순간 허벅지까지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조심해야 한다.

체르마트는 일본과 스위스가 합작으로 개발한 곳이다. 다른 나라의 관광지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덕에 일본인 관광객은 한국인 관광객보다 대접을 받는다. 국제적인 협력이 해외에서 자국민의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정오가 되면 체르마트의 식당과 몇몇 상점을 제외하고는 우체국을 비롯한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점심 휴식시간이다. 점심 식사 때 1시간도 다 쉬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뜻밖의 풍경이다. 관광지, 그것도 세계인이 몰려드는 관광지에서 점심시간이라고 문을 닫고 사라지는 풍경은 야박하리만치 당당해 보인다.

스위스 글·사진=송옥진 객원기자 oakjin@hanmail.net
취재협조=내일여행 02-777-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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