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소를 조각한 체르마트

흰 와이셔츠나 브라우스 차림으로 퇴근한 날은 서울에서 산다는 것이 서글퍼진다. 특별히 외근이 많은 직업이 아니더라도 하옛던 목과 소매는 온갖 매연과 먼지로 하루만에 제 색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서울만이 아니다. 웬만한 대도시의 대기 오염은 법정 허용치만 넘지 않았을 뿐 기꺼이 들이마시고 싶은 공기와는 거리가 멀다.

스위스 발레주의 산악마을 체르마트(Zermatt)에서는 우리 몸이 필요로 하는 공기가 어때 야 하는 지를 실감할 수 있다. 공기 오염을 막기 위해 가솔린 차량은 출입 자체가 금지돼 있는 탓에 체르마트로의 여행은 중간역인 티슈에 차를 세우고 등산 철도를 타야 한다. 마을에 도착해서도 전기 자동차와 자전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당연히 공기가 맛있을 수밖에 없다. 1620m의 고산마을을 산 아래와 연결해 주는 산악열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심호흡을 하자. 마테호른의 장엄함이나 스키 타는 재미 이전에 몸 안 가득 퍼지는 상쾌한 공기는 체르마트 여행의 보이지 않는 선물이다. 폐 속 가득 신선한 공기가 들어차면 지금부터 체르마트의 여행이 시작된다.

이탈리아와 접하고 있는 산골 마을 체르마트는 스위스에서도 손꼽히는 스키 리조트. 겨울철이면 전 세계에서 몰려 든 스키어로 만원을 이루지만 5월이 지나면 마을 전체가 방학을 맞은 듯 조용한 고산휴양지로 변신한다. 여름이면 조용히 내부수리에 들어가는 동네 목욕탕처럼 체르마트의 몇몇 호텔은 짧은 휴가에 들어가기도 할 정도.

하지만 스키가 목적이 아니라면 오히려 스키 시즌을 피했을 때가 차분히 체르마트의 여행을 즐기기에 좋은 시기다. 북적이는 관광객이 없는 체르마트는 유명 관광지의 번잡함을 찾아볼 수 없는 스위스 시골마을의 풍취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특히 영봉 마테호른과 마주하는 순간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값진 추억을 간직할 수 있다.

♠ 체르마트의 수호신 마테호른

체르마트는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로고로 잘 알려진 마테호른산(Matterhorn·4478m)을 오르기 위한 관문으로 유명하다. 모든 영화인들이 모이는 거대한 산을 꿈꾸는 파라마운트사의 바램을 나타내기에 마테호른은 최고의 캐스팅이 아닐 수 없다. 워낙 높다 보니 삼대는 공을 들여야 제 모습을 드러낼 것 같은 마테호른이지만 일단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면 누구나 감탄의 탄성을 내지르게 된다.

마테호른은 끊어질 듯 이어지는 부드러운 곡선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우리네 산수와는 생김새가 완전히 다르다. 마테호른의 첫인상은 위엄과 당당함이다. 기백 넘치는 천재 조각가가 사각뿔을 기운차게 조각해 놓은 듯한 모습이 시원스럽게 잘 생긴 남자의 얼굴을 보는 듯 하다. 마테호른은 동벽과 북벽이 보이는 스위스 쪽에서 바라봤을 때 가장 균형 잡힌 모습을 보게된다는 평이 결코 과장은 아닌 듯 싶다.

♠ 스위스서 보면 가장 균형적 美

체르마트에서 보는 먼 발치의 마테호른을 보다 가까이에서 보고싶다면 등산열차를 타고 고르너그라트(3130m)까지 오르면 된다. 오렌지 빛깔의 열차를 다고 고르너그라트로 향하는 길은 마테호른의 곁으로 다가가는 가장 손쉬운 선택. 등산열차가 올라감에 따라 철길 옆으로는 야생초 사이의 만년설이 히끗히끗 얼굴을 드러내고 차창 넘어로는 상쾌한 바람이 이마를 가른다.

열차를 타고 손쉽게 올라 온 것 같지만 고르너그라트는 웬만한 산의 정상보다 훨씬 높은 고지대. 3000미터가 넘는 고지대에 오른 만큼 가슴이 답답하거나 평형감각이 떨어지는 등 작지만 확실한 신체의 변화가 지금 서 있는 높이를 실감케 한다. 어느 정도 신체가 적응하면 마테호른을 감상할 시간이다. 마테호른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선 선글라스를 챙겨야 한다. 마테호른뿐만 아니라 고르너그라트 주위의 만년설이 햇빛을 반사하기 때문. 마테호른과 마주 선 사람들은 예외없이 저마다의 생각에 잠기곤 한다.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하는 젊은이를 비롯해 변지 않는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도 있고 남은 생을 정리하는 노년의 관광객들도 눈에 보인다.

물론, 마테호른 감상이 체르마트 여행의 전부는 아니다. 체르마트는 걸어서 돌아봐도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작은 마을이지만 관광객을 상대하는 각종 기념품 가게들이 가득하며 마을을 기점으로 한시간이나 두시간 코스의 트레킹도 즐길 수 있다. 저녁이면 식사를 하고 가볍게 맥주나 와인을 즐길 장소도 충분하다. 이밖에 산악박물관도 체르마트의 특별한 볼거리. 마테호른 등정 과정에서 일어난 각종 사고 기록이나 각 봉우리의 축소 모형을 비롯해 1860년대에 사용한 등산 자일 등 알프스 등반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체르마트 인근에 서식하는 동물의 박제와 꽃 생물 지질에 관한 기록, 산악인들의 사진도 살펴볼 수 있다.

스위스 글·사진=김기남 기자 gab@traveltimes.co.kr



+++++ 플러스 α +++++

★ 체르마트는 제네바를 비롯한 스위스 각지에서 기차를 이용해 갈 수 있으며 제네바에서는 대략 3시간30분에서 4시간, 취리히 5시간, 시옹에서는 2시간 가량이 소요된다.
★ 체르마트에서 고르너그라트로 향하는 열차를 탈 때 마테호른을 보다 잘 보고 싶으면 오른편에 앉는 편이 좋다.
★ 체르마트에서는 슈퍼마켓을 포함한 모든 상점이 6시30분이면 아무런 미련없이 문을 닫기 때문에 식료품을 사거나 쇼핑을 계획하고 있다면 시간을 잘 배분해야 한다.
★ 하늘 맑은 날 자동카메라나 디지털카메라로 마테호른 배경의 인물 사진을 찍을 때 후레쉬를 강제로 발광시키면 배경과 인물을 모두 살리는데 도움이 된다.
★ 자세한 정보는 체르마트 관광청(www.zermatt.ch)과 스위스 관광청(02-739-0034, www.myswitzer lan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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