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살로 그린 그림을 만나다

1월 하순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도착하니 바람은 제법 쌀쌀한데도 햇살은 무지 따사롭다. 산맥 하나의 차이가 이정도일 줄이야. 비까지 내려 우울하기만 하던 겨울의 파리와는 또 다른 표정이다. 추위에 시달린 한국의 겨울과 비교해 봐도 날씨는 일단 합격점을 주고 싶다. 붉은 색으로 대표되는 스페인에서의 태양은 겨울에도 여전히 빛을 내고 있었다.

겨울 햇살마저 따뜻한 곳, 스페인. 따사로운 햇살이 스페인에 있어서, 특히 스페인 예술에 있어서 중요한 기본이 됐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햇살아래 마드리드 도심을, 남부의 이슬람 문화권을, 지중해의 바르셀로나를 돌아다니고 난 후 태양은 정열적이면서도 느긋한 스페인 사람들의 기질을, 피카소를 비롯한 대가들을 탄생시킨 스페인 예술을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스페인 예술을 체험하는 첫 출발지는 바로 마드리드. 솔직히 스페인으로 오기 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지식이라곤 투우와 플라멩고, 축구의 나라라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몇 페이지 넘기지도 않은 스페인 관련 에세이 한권, 유럽 종합 가이드북 한권, 스페인이 포함된 미술관과 박물관 안내서가 가지고 있는 무기였을 뿐이다. 그 마저도 피곤과 일정에 쫓겨 겨우 기차 안에서 몇 장 넘겼을 정도니 혹자가 ‘스페인에 왜 왔냐’고 물으면 할말이 없을 정도였다.

마드리드에는 크고 작은 미술관이 많이 있지만 마드리드의 3대 미술관으로는 프라도와 레이나 소피아, 티센을 꼽고 있다. 이 3개의 미술관은 빠세오 델 프라도 거리를 중심으로 삼각형의 모양으로 도보로 이동 가능한 거리에 모여 있다. 스페인 관광청에서는 이들 미술관 외에 국회의사당에서부터 로페 데 베가박물관, 성3위일체 수도원, 넵튠분수, 식물원을 거쳐 레이나 소피아(국립소피아왕비예술센터)까지를 예술 산책길로 부르고 있다.


■ 스페인 미술의 산실 프라도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은 마드리드 뿐만 아니라 스페인을 대표하는 미술관이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 외관부터 이방인들의 눈을 붙든다. 1785년 설계를 시작해 약30여년의 시간이 흐른 후 완성됐다. 1819년에 개관한 프라도는 페르난도 7세 왕이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미술 수집품을 이곳에 전시하였으며 19세기 말에는 국가 소유로 이관되면서 다른 작품까지 기증받았다. 또 종교기관 재산법에 의거, 종교기관에서 소유하고 있던 작품들을 환수조치하여 명실 공히 스페인 최대 규모의 미술관으로 자리잡았다.

외관도 외관이지만 프라도를 미술관으로서 스페인에서 가장 우위에 두는 이유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회화 및 조각 작품들이 중점적으로 전시돼 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네덜란드나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작품도 있지만 스페인을 대표할만한 작가인 벨라스케스, 고야, 엘 그레꼬, 뮤릴로, 리베라, 슬바란 등의 걸작품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뮤릴로의 문으로 들어가 그라운드 층부터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12세기부터 20세기 초의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보스코의 오래된 그림에서는 현실과 미래를 풍자한 상상력에 웃음짓고 빛바랜 종교화 앞에서는 난해함과 경건함을 동시에 느낀다. 피카소가 재해석한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와 고야의 두점의 마하 시리즈 ‘옷을 입은 마하’와 ‘옷을 벗은 마하’도 프라도에 있다.

■ 피카소와의 조우 레이나 소피아

스페인 남부로 향하는 각종 기차편을 탈 수 있는 아토차 역 맞은편에 위치한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ia)은 투명 엘리베이터가 건물 밖으로 향한 현대적 외관답게 20세기 미술을 위한 공간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국립병원을 보수해 1986년 일부 문을 열고 88년 국립 미술관이 됐다. 레이나 소피아는 전시공간으로서의 미술관 뿐만 아니라 종합 문화센터로서의 역할도 함께 하고 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 오래 기간동안의 프랑코 독재 기간이라는 현대사에서 스페인 미술 또한 풍부하게 발전했다. 스페인 출신으로 20세기를 이끈 거장 피카소, 달리, 미로 등과 함께 아방가르드, 초현실주의, 스페인 현대조각과 팝아트 등의 작품들을 두루 돌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레이나 소피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은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이다. 349.3×776.6cm 규모의 대작인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 바스크 마을에서 일어났던 독일군의 무차별 폭격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전쟁의 부조리와 인감의 존엄성 등을 표현하고 있다.

제 6전시실 중앙을 한켠을 차지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 작품은 입체주의적 작품으로 희화화되어 표현돼 있지만 작품 자체가 주는 장엄한 무게감은 공간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대작이 탄생하기까지 피카소가 남긴 수많은 노력의 파편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작업의 원형이 된 수많은 스케치들이 걸작이 탄생하기 까지의 산고를 알리고 있다.

■ 인상파 작품들도 만나는 티센

까스띠요 광장을 사이에 두고 프라도 미술관과 마주보고 있는 티센 보르네미싸 미술관(Museo Thyssen-Bornemisza)는 네덜란드 출신인 티센 일가가 수집한 광범위한 미술품이 모여있다. 19세기 초반에 지어진 미술관 건물은 마드리드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네오클래식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티센의 장점은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걸쳐 각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두루 전시돼 있다는 것이다. 티센 하나만 둘러보고도 대략의 미술사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네덜란드 작품이 많다는 점도 스페인 화풍과 비교하며 감상하기에 좋다.

특히 1층 작품실에는 17~20세기 네덜란드 출신 화가들의 작품과 드가, 마네, 르느와르, 반 고흐, 세잔 등 낯익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크게 회자되는 작품은 없지만 2층 전시실부터 순서대로 감상하다 보면 중세와 근대 작품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각 미술관 기념품점에는 그립엽서를 비롯해 머그잔과 컵받침, 미술관 안내책자, CD롬, 장신구류, 포스터와 사진틀, 화집 등을 구입할 수 있다. 기념품점 구경은 미술관 구경과는 또다른 쏠쏠한 재미를 준다. 욕심 내다 보면 한도 끝도 없으니 주의할 것. 각 미술관 주변은 다양한 특징을 가진 카페들도 있어 미술관 구경에 지친 다리와 머리를 쉬어가기 그만이다.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파라솔을 펼친 노천 테이블에 앉아 커피나 맥주 한잔으로 미술감상 후의 여운을 달랠 수 있다.

마드리드=김남경 기자 nkkim@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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