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아득한 옛이야기

수원은 갈비로 유명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로부터 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정조임금은 아버지의 능을 이전하는 한편 왕위를 물려준 후 자신이 내려와 살 곳으로 계획도시 수원을 건설했는데, 새 도시로 이주한 주민들에게 준 혜택 중 하나로 두 집에 한 마리씩 소를 하사했다.

이외에 새로 만들어진 도시 수원의 주민들에게는 10년 동안 세금과 역이 면제됐고, 정조가 수원에 내려올 때마다 수원에 거주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특별과거 시험을 치러 6~7명의 관리들을 별도로 선발했다. 이 때문에 이동이 거의 없던 농경문화 시절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수원으로 몰려들었다. 정조는 또 수원에 화성을 쌓고 유수부를 설치하는 등 별도의 군사를 훈련시켰으며, 행궁을 건설하고 이곳에서 혜경궁 홍씨의 일흔 번째 생일 연회를 성대하게 개최하는 등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화성답사투어로 역사 따라잡기

-천하의 명당 융건릉, 조선 전성기 문화 여실
-지역주민이 함께 행궁 수문장 교대의식 재현
-성곽 역사 고스란히 기록 담은 ‘화성성역의궤’


■ 융건릉

융건릉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혔다가 죽은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과 정조 임금의 무덤인 건릉을 각각 말한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당대 최고의 명당자리라고 해서 선조와 효종이 죽었을 때도 능으로 삼으려다, 본래 수원읍치가 위치하던 지역이어서 이를 포기했었다. 정조는 과거의 사적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고 도시전체를 지금의 수원시 자리로 옮기면서까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으로 삼았다.

정조는 효심으로 특히 유명하다. 역적으로 몰려 죽은 아버지였지만 정조가 왕이 돼 처음으로 내린 교서에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했으며, 살아 있는 동안 열세 차례나 이곳에 원행(세자의 무덤을 ‘원’이라 함)을 다녀갔다.

얼핏 생각하기에 공사를 제쳐두고 잦은 원행을 한 것과 명당이란 이유로 살던 주민을 내쫓고 그 자리에 왕족의 능을 조성한다는 것은 권력자의 횡포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왕이 자리를 여러 차례 비워도 될 만큼 정조가 통치하던 시기의 조선이 안정돼 있었으며, 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쓸 만큼 왕권이 강화된 시기였다. 게다가 새로운 읍치를 건설하고 이전한 주민들에게 충분한 삶의 근거를 마련해 줄 만큼 나라의 국고가 튼튼했던 태평성대가 또한 정조 통치기간이었던 것이다.

융건릉은 왕릉 중 가장 원형 상태로 보존이 잘 돼 있는 곳이자 조선시대 문화융성의 증거이기도 하다. 정조 또한 죽은 후에 이곳에 묻혔으며 그 후 순조, 헌종, 철종, 순종황제까지 계속 10년 단위로 내려와 친히 내려와 제를 올렸다.

■ 화성행궁

행궁은 왕이 한양에 있는 궁성 외의 지역에 갔을 때 머무르던 곳이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에 왔을 때 사용됐다.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칠순 연회인 진찬연을 어머니가 장수하길 비는 마음으로 그 이름을 지었을 봉수당(奉壽堂) 앞에서 성대하게 치루기도 했다. 또 누각의 이름이 ‘새로운 고향’이라는 뜻의 신풍루인데 정조가 일찍부터 수원에 내려와 정착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한편 경복궁이 맨 처음 지어졌을 때 390칸이었던 것과 비교해 화성행궁은 총 규모가 567칸으로 건설되는 등 웅장함과 화려함을 자랑한다. 한때는 일제가 이를 해체하고 경찰서, 학교, 병원 등의 수난을 겪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복원 사업을 거쳐 ‘대장금’ 등 사극의 촬영지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수원시는 화성행궁 앞에서 매주 일요일 오후 2시에 한 차례씩 수문장 교대식을 재현하고 있다. 고정연기자가 교대식을 재현하는 덕수궁 등과 달리인터넷 통해 신청을 받아 일반 시민들이 오전에 나와 훈련을 받고 분장을 거친 후 직접 의식에 참가한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것이 아니라 동작 등이 어설프게 보이기도 하지만 일반 시민들이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도 되새기고 특별한 추억을 만들 수 있어 좋다.

수문장 교대식에 앞서서 정조임금과 혜경궁 홍씨가 옛 복장을 그대로 갖춘 채로 등장하고 이를 같이 관람한다. 교대식이 끝난 후에는 디지털 카메라로 정조임금과 혜경궁 홍씨와 함께 기념촬영도 무료로 해주고 이를 다시 웹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게끔 올려놓는다.

■ 화성

화성은 1997년에 유네스코에서 창덕궁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원칙대로라면 화성과 같이 일제침략이나 한국전쟁 등으로 최초 건설 당시의 유적이 심하게 훼손된 경우 세계문화유산 등록이 어렵다.

하지만 화성의 경우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자를 통해 지어진 위치, 쓰인 돌의 개수 등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한 화성은 조선 과학의 발전을 보여주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만든 거중기 등을 통해 당초에 10여년을 생각하고 시작했던 화성은 그에 5분의 1에 해당하는 약 2년여 만에 완공할 수 있었다.

화성은 수도방위의 전초이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과 행궁을 보호하기 위해 건립됐다. 이 때문에 정조는 화성이 세워진 후에는 정조는 화성유수부를 만들고 당시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영의정을 화성유수로 임명했으며 이밖에도 3정승6판서가 참여하는 국무회의에도 유일하게 화성유수가 직접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등 화성과 수원을 중시했다.

화성은 복원 공사를 거쳐 더욱 일반 시민과 가까워졌다. 팔달산 자락부터 만리장성을 걷듯이 성곽 위를 직접 산책을 할 수도 있고, 팔달산에서 출발해서 연무대까지 화성의 주요문화재를 관광할 수 있는 화성열차도 운행해 색다른 재미를 제공한다.

이지혜 기자 imari@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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