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건국황제들의 거처 ‘선양고궁’
-만주, 한족, 몽고, 장족 문화의 집합체
-자금성에 이어 중국 내 최대 규모 자랑

소현세자 유배지, 박지원의 열하일기, 최명희의 혼불, 이태준의 만주기행…….
삭풍의 만주벌판. 그 중심에 있는 도시가 선양이다. 선양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몰라도 ‘봉천’이라는 지명은 역사책 또는 소설 등에서 들어봤을 것이다. 선양은 조선 땅에 서학을 처음으로 전파해 준 땅이며,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군들의 활동장소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도 현대화를 걷고 있는 대도시 선양에서 느낄 수 있는 과거의 흔적들은 한국인들에게 있어서만큼은 다양하기만 하다.

선양은 중국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중국의 마지막 봉건왕조였던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근거지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변방에 거주하던 일개 오랑캐 여진족의 나라 ‘금’은 1625년에 선양으로 천도한데 이어 베이징에 입성하게 되는 1644년까지 20여년의 세월동안 이곳에서 대청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그 역사의 흔적으로 태조 누르하치와 태종 황태극이 머물렀던 선양고궁과 그들의 능인 동릉과 북릉이 남아있다.

● 황궁안 구석구석 엿보기

자금성 다음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큰규모를 자랑하는 선양고궁은 세 번의 공사를 거쳤다. 누르하치 때 세워진 동로와 황궁의 주요 건물들을 형성하는 황태극 때 세워진 중로와 후일 건륭황제에 이르러 완성된 서로이다.

동로의 주요 건축물은 대정전과 10개의 왕정이다. 유목민족이었던 여진족이 막 나라를 세운 후 만든 궁궐인 만큼 동로는 그들의 건축양식이 십분 반영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폐쇄성보다는 개방적인 성격을 보여줘 타민족의 문화 또한 묻어난다.

동로의 가장 특징정인 건물인 대정전은 멀리서 보면 몽골포 즉 몽고천막의 형상이다. 대정전에 보다 가까지 다가가서 보면 건물 전체에서 만주족, 한족, 몽고족, 티베트족의 건축양식을 모두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오는 기둥을 휘감고 있던 쌍용은 황제를 용으로 상징화하던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이다. 대정전이 황제인 누르하치가 집무를 보던 곳임은 물론이다. 이밖에 지붕의 초록색은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조상의 뿌리를 잊지 말자는 의미이며, 지붕 꼭대기에 있는 화려한 장식은 티베트 라마교 건축에서 자주 보던 양식이다.

이렇듯 한족 외에 멀리 몽고와 티베트족의 영향이 나타나는 까닭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북방의 몽고족과 서역의 티베트족과 화친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양 황족 간의 혼인을 장려한다거나 국교로 라마교를 지정하는 등의 정책을 취하기도 했다.

대정전의 좌우에 위치한 왕정은 군사 위주로 국정이 운영되던 초기 청나라의 팔기군의 각 사령관이 집무를 보던 곳이다. 현재 이들 건물에 들어가면 실제로 이용했던 각 부대별 색색의 갑옷과 무기 등이 전시돼 있다.

중로부터는 한족 문화가 적극 반영되고 있다. 북경의 고궁인 자금성을 방문하면 정전을 기준으로 중요 건축물들이 일직선을 이루는데 중로의 건물들 역시 정문을 들어서면 집무실인 숭정전이 나오고 그 뒤로 봉황루와 청녕궁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이는 두 번째 황제인 황태극이 건국에 이어 치세를 위해 한족관리를 대거 정치에 등용한데서 기인한다. 청나라는 통치 전반에 걸쳐 몽고족이 건국한 원나라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려 힘썼지만, 또 한편으로 발전을 위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데도 적극적이었다. 이렇게 보면 조선에 처음으로 유입됐던 서학 서적들이 선양을 통해 들어온 것 역시 이상하지 않다 하겠다.

일종의 누각인 봉황루는 고궁이 생겼을 때 만주 사방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고 한다.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감시하던 곳이자 황태극은 이곳에 올라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고층빌딩들에 가려 한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광활한 만주벌판 위로 해가 떠오르고 해가 지는 풍경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청녕궁은 황제와 황후의 침궁이다. 남향의 청녕궁 정면에 봉황루가 위치하고 양 옆으로는 후궁의 처소가 바로 붙어 있다. 건물 내부의 구조를 보면 추운 지방인만큼 한국과 마찬가지로 온돌을 사용하는데 전체 모두 사용하지 않고 벽에 침대를 붙여놓은 듯 삼면에 일부를 차지한다. 만주족은 서쪽 벽에는 사람이 이용하지 않고 조상 또는 수호신의 신주를 모셔두는데 누르하치는 중국에서 무인들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는 관운장의 초상을 모셔 놨다.

3대 순치황제 이후에는 자금성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곳의 실질적인 주인들은 황태극과 그의 황후 보르기지르 및 후궁이었던 혜란주와 장비 등이었다. 혜란주는 황태극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고 장비는 순치황제의 어머니로 이들의 야사가 사극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고 한다. 각 방에는 이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적은 안내판이 마련돼 있기도 하다.

선양고궁은 베이징의 자금성으로 옮긴 후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황제의 동순 때 이궁으로 사용됐다. 건륭황제 때 마지막 축인 서로를 건설해 사고전서를 보관하는 문소각 등을 증축했다.

중극 선양 글·사진〓이지혜 기자 imari@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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