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과학도 풀지 못한 인류의 유산

이집트는 피라미드만 가지고도 몇 권의 책은 거뜬히 나올 만큼 많은 얘기를 담고 있기에 어줍지 않게 뭔가를 쓴다는 것은 대단히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이집트 역사를 알아야 하고 그들의 종교나 정치관, 생활상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외형적인 수치만 가지고서는 도무지 이집트를 설명할 길이 없다. 이집트를 맞닥트린 얄팍한 글쟁이들은 누구나 그런 어려움을 느꼈으리라. 그래서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미리 양해부터 구하고자 이렇게 서론이 길어져버렸다.

-대 피라미드, 이집트 여행의 하이라이트
-견고한 아름다움으로 찬란한 문명 전달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빼놓고는 이집트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 때로는 이 피라미드가 이집트의 섬세한 부분을 놓치게도 하지만 현대 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피라미드의 비밀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도 동경이자 미지의 세계이자 옛 영광에 대한 무한한 추억이기도 하다. 신비를 품은 4000~5000년전의 피라미드는 오늘날 전 세계인들이 한번쯤 방문하고픈 열망을 갖게 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오늘날 이집트의 아이콘이 된 피라미드는 기자 언덕에 있는 3개의 대피라미드가 대표적이지만 실제 이집트 전역에는 크고 작은 108개의 피라미드가 있다. 대피라미드를 보러 가는 도중에도 사막 여기저기에 짓다만, 아니면 허물어진 피라미드의 흔적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파라오의 제국이라 부르는 고대 이집트 중 고왕국시대(기원전 약 2640~2155년), 파라오들은 스스로를 신으로 여기고 그들이 섬기는 태양신과 좀더 가까이 닿고 싶어 했다. 사후에는 태양신과 만나 영생을 누릴 것으로 기대했던 이들은 경쟁적으로 높이 무덤을 쌓기 시작한 것이 피라미드의 기원이다.

최초의 계단식 피라미드가 등장한 것은 기원전 2700년전. 그 이전 파라오부터 연습을 거듭해 왔고 조세르 왕이 마침내 성공시켰다. 그의 피라미드는 안에 공간없이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형태다. 무덤은 별도의 지하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최고 높이는 60m. 군데 군데 허물어지긴 했지만 당시의 위용을 느끼기에는 손색이 없다. 푸른 하늘과 어우러져 예쁘기까지 하다. 과거의 위용을 알리는 신전의 흔적도 남아있어 함께 돌아볼 수 있다.

기자(Giza)의 대피라미드는 피라미드 여행의 하이라이트이다. 일찍이 문학가들은 “세상 모든 것들은 시간을 두려워하지만 시간은 피라미드를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피라미드를 맞닥트리니 과연 수천년의 시간동안에도 흩트러짐 없이 인간사를 굽어보고 있다.

대피라미드는 쿠푸(케옵스)왕과 카우라(케프렌)왕, 멘카우라(미케노리스)왕 등 3대 부자의 피라미드를 가르킨다. 쿠푸왕이 즉위한 것이 기원전 2551년, 미케노리스는 기원전 2471년 즉위했다. 약 100여년만에 세 개의 피라미드가 지어진 것이다.

피라미드는 가까이서 보면 마치 돌을 차곡 차곡 쌓아놓은 튼튼한 성벽같은 느낌이다. 오늘날 피라미드가 만들어낸 그늘은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가족들의 하루 쉼터이다. 실제로 휴일이면 도시락 등을 싸들고와 피라미드 밑에서 삼삼오오 모여 음식을 나눠 먹기도 한다.

하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왜 피라미드가 이집트를 상징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을 듯하다. 단순한 듯하면서도 균형미와 조화미가 현대의 화려한 그 어떤 건축물들을 압도한다. 과연 인간이 만든 피조물인가 싶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한변의 길이가 230m, 지면과 닿은 부분의 넓이는 5만㎡, 높이는 원래 146m이다. 제일 처음 세워진 쿠푸왕의 피라미드에 사용된 돌만해도 260만개. 무게는 700만 톤에 달한다. 지상의 기초 부분은 1㎥짜리 돌 조각들 201개가 일렬로 짜맞추고 있고 그다음 돌의 높이는 1.5m,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들어 정상 부분에는 0.55m 높이의 돌들이 놓여졌다.

피라미드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는 데는 이런 규모 때문만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피라미드가 세워진 속도 때문이다. 파라오(왕)가 즉위를 하면 바로 그가 사후에 묻힐 무덤 공사를 시작한다. 쿠푸왕이 즉위한 기간은 20년. 이 기간동안 피라미드가 세워진 것인데 계산을 해보면 돌 하나가 놓이는 시간은 4분밖에 안걸린 셈이다. 세 개의 피라미드에 사용된 돌이면 폭 30cm, 높이 3m의 성곽으로 프랑스 국경 전체를 두를 수 있다고도 한다.

대략 알려진 피라미드가 설립된 원리는 피라미드 한변으로 진흙길을 만들어 차곡 차곡 쌓아올렸다. 꼭데기까지 세운 후 외장 공사를 하며 매끄러운 석회석 외장을 두르고 부조까지 새기며 진흙을 차츰 걷어 삼각형의 피라미드 모양을 완성했다고 한다.

피라미드가 놓여진 지리적 위치와 재료의 이동, 건축 비법 등이 현대 과학으로도 명쾌한 해답을 내릴 수 없는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난해함은 차치하고 수천년이 지나도 끄덕 없이 견고한 피라미드를 보며 가볍고 외형적인 면에만 치중하는 현대 건축의 얄팍한 상술에 경종을 울리는 듯하다.

지금 돌계단으로 남아있는 것은 15~16세기 이슬람 정복시 아랍인들이 이 외장을 벗겨 이슬람 사원 만드는 데에 사용했다. 지금도 외장을 둘렀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는데 외장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면 밝은 낮에는 눈이 부셔 감히 피라미드를 쳐다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피라미드에 압도당한 이들은 3개의 대피라미드 앞을 지키고 있는 스핑크스와 맞닥트린 순간 다시 할말을 잃는다. 지금은 많이 깨지고 상처가 났어도 사자몸에 여자의 머리를 하고 있는 스핑크스의 위용은 변함이 없다. 길이는 73m, 얼굴 길이만 해도 5m에 이르는 이 건축물은 지금은 이목구비를 뚜렷히 구별하기에 어려움이 있지만 신왕조시대의 하쳅수트 여왕의 얼굴형을 닮았다고 하고 이를 세운 케프렌왕의 얼굴을 닮았다고도 한다. 대 피라미드 앞에 서서 마치 침입자와 도굴꾼 등에 의해 상처난 고대 문명의 산실을 소홀히 관리한 현대인들을 꾸짖고 있는 듯하다.

대피라미드가 초기의 계단식 피라미드와 다른 점은 왕의 시신을 안착할 수 있는 방이 피라미드 밑의 지하가 아닌 피라미드 속에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다. 3번째 피라미드인 맨카우라 왕의 무덤에는 좁은 통로를 따라 들어가 내부를 돌아볼 수 있도록 했다.

이미 도굴꾼들과 탐험가에 의해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내부에는 그저 오랜 옛날 모든 영욕을 누렸을 제국의 대왕이 잠들어있었던 흔적만 쫓을 뿐이다. 피라미드 안에서는 덥지도 않고 음식 등도 잘 안썩는다고 하니 그저 고대인들이 남긴 수수께끼에 경탄할 뿐이다.

이집트=김남경 기자
nkkim@traveltimes.co.kr
취재협조=대한항공 02-2656-2001,
이집트관광청 02-795-0282, 트라브코 20-2-737-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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