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뤄양의 흥망성쇄

뤄양(낙양)은 중국에서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고도로써 시안(서안) 다음으로 꼽히곤 한다.
뤄양은 흔히 아홉 왕조의 고도로 칭해진다. 서주, 후한, 위나라, 서진, 북위, 수, 당, 후량, 후당 등의 수도 또는 부도였다. 부도는 수도 외에 이의 기능을 일부 나눠 갖는 곳으로 주나라 때 무왕은 서북에 치우쳐 있는 장안의 지리적 약점을 보완하고자 동생 주공을 뤄양에 보내 성곽을 쌓도록 했다. 또 역사책에서 봤던 ‘동주시대’와 ‘서주시대’는 주나라의 수도가 시안이냐 뤄양이냐를 가지고 그 위치를 동서로 본 것. 전한과 후한 시대 역시 각각 시안과 뤄양을 수도로 삼았다.

옛날 수도는 물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뤄양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떨어지는 태양’이 아닌 ‘낙수의 북쪽’이라는 뜻이다. ‘양’은 북쪽, ‘음’은 남쪽을 가리키는 것으로 청나라의 초기 수도였던 선양(심양) 또한 심수의 북쪽에 있다는 뜻을 지닌 것과 같다.

장안을 대신해 뤄양이 수도로써 부각된 데에는 물의 역할 또한 컸다. 전국에서 거둬들인 세금을 비롯한 물자 등을 수도로 운반할 때 육상 수송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었기 때문에 뱃길을 이용해야 하는데, 장안의 경우 황하의 최대 난관으로 꼽히는 삼문협이라는 장애물이 버티고 있었다. 삼문협은 귀(신의)문, 신(의)문, 인(간의)문 즉 세 가지 문으로 물속에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있어 이에 부딪히면 배가 난파됐다. 이와 반면에 뤄양은 강남 경제가 부상한 후에 크게 부각된다. 수나라를 휘청거리게 할 만큼 큰 공사였던 대운하는 북방의 황하와 남방의 장강을 잇는 것. 이로써 뤄양은 물자 집결지로 큰 번영을 누리게 된다.

뤄양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후한과 북위 시기였으며 뤄양의 동쪽 근교에는 한위낙양고성이라 불리는 유적이 남아있다. 삼국지에서 동탁이 헌제를 납치하는 곳이 바로 뤄양이고, 조조의 북위 역시 뤄양을 거점으로 삼았다.
탁발족이 세운 북위는 본래 운강석굴이 있는 따퉁(대동)을 수도로 삼았으나 효문제 때 비옥한 땅을 찾아 이곳으로 천도하게 돼 이곳에 용문석굴과 같은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중국 역사와의 조우

■ 석굴암을 떠올리게 하는 용문석굴

국가 주도의 대승불교가 강성했던 북위는 뤄양에서 운강석굴에 비견할 만한 용문석굴을 건설했다. 뤄양의 남쪽에 위치한 용문석굴은 이수라는 강가를 따라 주조돼 있다. 이수를 중심으로 서쪽이 용문산이고 동쪽이 향산이다. 이수는 북쪽으로 흐르고 있어서 용문석굴로 들어가는 입구를 기준으로 보면 좌측이 향산이고 우측이 용문산. 양측을 연결하는 대교에서 바라보면 양 산이 마치 문과 같은 형상을 이룬다. 보통 이곳에 방문하면 용문석굴만을 관람하게 되는데 사실 향산에는 백거이가 말년에 머물며 창작활동을 했으며 또한 그의 무덤이 있어 한번쯤 방문해볼만 하다.
용문석굴은 둔황(돈황)의 막고굴, 따퉁(대동)의 운강석굴과 함께 중국 3대 석굴로 꼽히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흔히 막고굴과 운강석굴은 아름다운 벽화를 용문석굴은 정교한 조각을 매력으로 꼽는다.

하지만 일반 관광객 입장에서 막상 용문석굴을 직접 관람하면 적잖은 실망을 할 수도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외국인들에 의해 주요 문물들이 침탈당했고 문화혁명 시기에는 홍위병들이 불교 유적이란 이유로 이를 파괴하기도 한 까닭이다.

또 막고굴이나 운강석굴을 먼저 봤던 관광객이라면 웅장하고 화려한 이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작고 아기자기한 용문석굴에 감탄하기란 쉽지 않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용문산과 향산의 암벽에 약 1353개의 석굴이 있고 10만여개의 불상이 있다.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비로자나불이 17m이고 그밖의 불상들은 사람보다 작은 크기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까닭은 암석의 재질과 관련이 크다. 사막기후에 가까운 둔황과 따퉁은 석질이 부서지기 쉽고 비교적 조각하기 쉬운 편이다. 반면에 용문석굴은 암석이 단단해서 굴을 파는 것조차 어렵고 더군다나 그 돌에 섬세한 조각을 하는데 적잖은 공이 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경주의 석굴암이 세계의 많은 석불들과 비교해 단순한 듯 보이면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해야겠다.

이수 강가에 자리 잡은 용문석굴을 걸으면서 생각하게 된 것이 수재가 몇 번 나면 불상들이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실제로 이들 용문석굴에 영향을 줄만큼 큰물의 범람이 몇 차례나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암석의 단단한 재질은 천년의 세월 동안 이들 불상들을 물과 바람으로부터 보존해줬을 것이다.

용문석굴의 수많은 불상들 중에서 사람들의 눈을 가장 끄는 것은 높이 17m의 비로자나불이다. 용문석굴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이 석불은 당나라 고종 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 외모가 중국 유일의 여황제였던 측천무후를 모델로 했다고 전해진다. 고종은 무측천의 모습이 보살과 같이 단아하다고 자주 칭찬했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후세에도 남길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바로 이 비로자나불이라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불상을 보면 한없이 자애로워야할 보살의 모습보다 ‘앙’하고 다문 듯한 입술과 정면을 응시하는 눈 등에서 어딘가 모르게 권력과 영화에 대한 욕심을 담고 있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비로자나불만큼 크지는 않지만 용문석굴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 빈양중동 역시 눈여겨볼만 하다. 빈양중동은 북위의 선무제가 선친인 효문제와 문소황후를 위해 조성한 석굴. 내부의 불상과 예불도가 효문제와 관련된 내용으로 채워져 있고 중앙의 석가모니 좌상 역시 효문제를 모델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같은 왕조에서 만들었어도 무인의 기상이 느껴지는 따퉁의 석상과 달리 이 석가모니는 한화정책을 적극 펼치고 학문을 중시한 효문제의 학자적인 풍모가 느껴진다.

■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관우

중국 역사에 수없이 많은 영웅과 호걸들이 있지만 관우의 인기가 단연 으뜸이다. 도가에 바탕을 둔 특유의 민간신앙이 발전한 중국에서 관우는 또한 많은 사람들이 숭배하고 모시는 신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무인들의 신이었으며, 오늘날에는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재물신으로 추앙받는다.

이런 중국인들의 사랑에 힘입어 중국 전역에 관우를 모신 사당인 ‘관림’이 세워져 있다. 중국에서 성인의 무덤에는 ‘림’을 붙여 공자의 묘는 ‘공림’이고 관우의 묘는 ‘관림’으로 불린다. 가장 유명하고 방문해 볼만한 곳은 관우의 고향인 산시(산서)성의 펀시(분서)현에 있는 의복을 매장한 의관묘, 후베이성 번성에 몸을 매장한 묘, 관우의 머리가 묻혀 있는 뤄양의 묘 등 이렇게 세 곳을 꼽는다.

삼국지에서 보면 관우는 오늘날의 후베이성 쉬엔창(선창) 근처의 탕양(당양) 싸움에서 손권의 부하인 마충에게 패했다. 손권은 유비의 분개를 우려하는 한편 조조의 환심을 사기 위해 관우의 목을 잘라 뤄양으로 보내게 된다. 관우를 아꼈던 조조는 향나무로 몸을 만들고 제후의 예를 갖춰 장사를 지내줬는데 지금 뤄양에 있는 것이 바로 관우의 목이 묻혀 있는 수총인 셈이다.

명대에 세워졌다는 지금의 관림은 여러 대전이 있다. 관우의 학자적인 모습을 강조한 상이 있는가 하면 관우상 앞에 배 모양의 황금으로 된 중국돈이 잔뜩 쌓여 있어 재물신의 모습도 만나볼 수 있다. 관림 안에는 또한 관우와 함께 전장을 누빈 청룡언월도와 적토마도 있다. 청룡언월도는 대전 앞에 놓여 있는데 얼핏 보기에도 굉장히 무거울 것 같은데다가 사람 키를 훨씬 넘기는 길이여서 한 손으로 자유자제로 휘둘렀다는 것이 신기하다.

여러 전각을 지나치면 마침내 관우의 수총이 보인다. 무덤 앞에는 두 판의 흑석이 놓여 그 돌 위에 자판기 동전 넣는 곳과 같은 구멍이 각각 뚫려 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좌측에 돈을 넣으면서는 입신양명을 기원하고 우측에 돈을 넣으면서는 부자가 되기를 기원한다고 한다. 마침 중국인 관광객들이 무덤 앞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었는데 한결같이 우측 구멍에 돈을 넣었다. 양쪽 돌판을 비교해 봐도 우측 구멍 쪽이 더 많이 닳아 있는 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부자되기를 기원하고 간 탓이겠다.

중국 뤄양 글·사진=이지혜 기자 imari@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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