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7월 10일. 그 다음날은 평양 보통강 려관 회의실에서 남북적십자 제 7차 회담이 열리는 날이다. 나는 그때 코리아 헤럴드의 기자 신분으로 평양을 방문하고 있었다. 당시 남측 이범석 수석대표 방에 많은 기자들이 모였다. 우리의 전략, 현안 타결 가능성 등에 대해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되자 이범석 수석대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갑자기 밖으로 나갔다. 자연 기자들도 그 뒤를 따랐고, 보통강 려관의 뒷뜰로 나가게 됐다. 그랬더니 거기서 자세한 얘기를 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수석대표의 방은 도청의 가능성이 있었기에 기자들을 뒷뜰로 이끌어 자세한 얘기를 했던 것이다.

또 “메모지 한 장 쓴 것까지 함부로 버리지 마시오”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회담장에서 우리 남한 측 사람들끼리 메모가 자주 왔다갔다 한다는데 그 메모지는 없앤다 하더라도 그 밑에 글자가 눌린 자국이 남는데 그것을 화학처리하면 모든 메모 내용을 다 재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전략이 드러날 수도 있지요.” 매사에 세심한 그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발언이었다.

외교클럽이나 한식당에서 기자들과 자주 어울려 아주 깊이있는 얘기를 나누지만 PR측면에서 보면 사소한 말실수로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는 자리에서 그는 한치의 실수도 하지 않았다. 진정한 PR전문가가 아닐 수 없다. 해야 할 것(do’s)과 해서는 안 될 것(don’ts)에 대해 철저한 인식을 갖고 하지 않아야 될 얘기는 끝까지 하지 않았던 그의 태도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는 오히려 기자들을 보호하려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는지도 모른다.

버마(미얀마)의 아웅산에서 참변을 당했을 때 그를 아끼던 많은 사람들이 ‘미인은 박명’이라며 가슴 아파했다. 덧붙여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범석 수석대표를 보좌한 정주년 대변인은 정말 흔히들 말하는 ‘환상의 콤비(dream team)’였다. 정 대변인은 이 수석대표의 표정만 보고서도 저 양반이 지금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유창한 영어로 남북적십자 회담 취재를 위해 방한한 외신기자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던 정대변인은 주태국 한국 대사를 지내고 현재는 서울시 관광협회 상근부회장으로 관광진흥에 힘쓰고 있다. 정 대변인은 1973년 한창 신혼 초에도 기자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새벽 2~3시까지 술을 함께 하면서 기자들을 “그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힘썼다.

기업의 CEO는 이제 언론의 메커니즘을 잘 이해하고 그 기업의 가장 신뢰할 만한 대변인으로서의 역할을 원만히 수행할 때 그 기업의 이미지는 더 좋아질 수 있다. 소수의 기업인들은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publicity-shy)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더 이상 미덕이 될 수 없고 기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져올 수 있다.

급변하고 있는 언론 상황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젊고 유능한 기자들은 언론의 윤리적인 측면에 많은 관심을 갖고 취재활동에 임하면서 기사를 쓰기 때문에 기업의 CEO나 PR담당자들도 거기에 맞게 변해야만 한다.
보도가치가 적은 것을 무리스럽게 기사화 하려고 노력할 경우 정말 보도가치가 있는 자료가 언론에 배포되더라도 기자들의 관심을 덜 받게 된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고 뉴스가치(news value)에 초점을 맞춰 대 언론관계 활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평양에서 만난 고 이범석 장관, 그는 최고의 외교관이면서 최고의 PR맨이었다. 그의 두 분야에 대한 탁월한 전문성 때문에 초창기 어려운 남북대화의 실마리가 잘 풀릴 수 있었다. 우리 기업의 CEO들도 급변하고 있는 언론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고서 효과적인 대언론 관계 활동을 해야만 하는 시대다.

김경해 kyonghae@commkorea.com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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