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판은 익숙한데 티니안은 낯설었다. 고작 3일을 여행했을 뿐인데 이제는 ‘나의 티니안’이 됐다. 이유는, 말하자면 좀 길다.

롱 비치 오른쪽 절벽에는 성인 한 명이 간신히 기어들어갈 수 있는 틈이 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누드 비치가 나온다
롱 비치 오른쪽 절벽에는 성인 한 명이 간신히 기어들어갈 수 있는 틈이 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누드 비치가 나온다

사이판은 왜 

그날 사이판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만석이었다. 비행기 티켓은 예전보다 비쌌지만 기내는 예전보다 꽉 차 있었다(코로나19로 한참 어려웠던 항공사들이 요즘은 재미가 쏠쏠하다던데 사실이었나 보다). 셀프 체크인을 미리 하지 않은 탓에 미아(포토그래퍼이자 이번 여행을 함께 한 동갑내기 친구. 미아는 미화의 애칭)와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동으로 배정된 자리를 기웃거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미리 좌석을 정해 둘 필요가 있나? 4시간 30분. 창가 자리에 앉아도 화장실 한 번쯤은 참을 수 있고 태블릿에 저장해 온 영화 한두 편 보다 잠시 잠을 청하다 보면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블로우 홀은 산호초 구멍을 뚫고 물줄기가 솟구쳐 분수를 만드는 곳이다
블로우 홀은 산호초 구멍을 뚫고 물줄기가 솟구쳐 분수를 만드는 곳이다

모든 사람들이 탑승하고 나니 그제야 생각났다. 맞다. 사이판이지. 우는 아기를 달래느라 바쁜 초보 부부, 그 옆엔 겸사겸사 효도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따라온 부모님, 그나마 말이라도 통하는 초등학생 자녀를 데려온 부부, 뭘 해도 그저 좋은 커플, 차곡차곡 모은 곗돈을 맘먹고 탕진하고 오겠다는 중년 아주머니들(또는 젊은 여성들), 3일 내내 골프만 치겠다는 계획이 뻔해 보이는 아저씨들이 2.5:2:2:1:1:1의 비율로 뒤섞여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우리처럼 혼자 앉아도 그만, 같이 앉아도 그만인 사람은 0.5 정도인 것 같은데 굳이, 반드시, 꼭 함께 앉아 가고 싶은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많았던 거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기내는 심심할 틈이 없었다. 이륙 후 앞자리에선 아기들이 자지러지게 울어댔고, 뒷자리에는 자식 자랑을 늘어놓거나 지난주에 다녀온 지리산이 얼마나 좋았는지 말하며, 이거 좀 먹어 보라고 (갑자기) 떡을 주섬주섬 꺼내는 K-어머니들이 있었다. 모든 형태의 여행객이 섞여 아수라장이 된 기내가 피곤하지 않았고, 심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괜히 커플 사이에 눈치 없이 낀 옆 사람이 된 것 같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떴다.

어차피 사이판은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다. 소박한 사이판 국제공항의 국제선 터미널 옆엔 이보다 더 소박할 수는 없을 국내선 터미널이 있다. 2018년 사이판을 강타한 위투(Yutu) 태풍에 기존 국내선 터미널이 날아가며 컨테이너 박스 형태로 임시 터미널을 만들어 놨다는데, 그게 벌써 5년 전이다. 화이트보드에 스티커로 붙인 비행기 스케줄 표와 몇 번을 재사용했을지 모르겠는 번호표(비행기 티켓)는 소박하다 못해 귀여워 웃음이 터졌다. 어쨌든 사이판 국내선 터미널(이라 불리는 컨테이너 박스)에 가야 로타와 티니안으로 향하는 경비행기를 탈 수 있다. 사이판에서 티니안까지는 15분. 이보다 조금 먼 로타까지는 30분이 소요된다. 기장을 포함해 5명이 탑승한 작고 소중한 비행기가 둥실, 바람을 탔다. 조마조마했지만 티가 나진 않았다.

고기를 굽거나 생선회를 뜨지 않더라도 바닷가 근처에서는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도 쉽게 볼 수 있다
고기를 굽거나 생선회를 뜨지 않더라도 바닷가 근처에서는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도 쉽게 볼 수 있다

●티니안에서 주말을 보낼 결심

목적지는 티니안이었다. 미아를 티니안으로 꼬득인 이유는 미안하지만 단순했다. 북마리아나제도를 이루는 사이판과 로타, 티니안 중 티니안만 다녀오면 나만의 도장깨기가 완성되기 때문이었다. 미아는 사이판에서도 보고 먹고 할 게 많을 것 같은데 왜 굳이 티니안에서 3일이나 있자는 거냐고 (분명) 투덜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첫째, 미아는 사이판에 가본 적이 없었고 둘째, 온라인에는 사이판에 대한 여행 정보가 티니안에 비해 훠얼씬 많았으며 셋째, 여행사에서 판매하는 티니안 상품 열에 아홉은 하루 혹은 반나절 투어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냥 좀 설렁설렁 쉬고 오자, 할 게 너무 많으면 진정으로 쉴 수가 없어, 티니안에도 뭐가 있겠지 하면서도 내심 초조했다. 남들 다 반나절만 놀다 오는 데는 정말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걸까. 나도 기사는 써야 하는데. 하늘에서 내려다본 티니안은… 그냥 초록색 정글이었다. 그 가운데로 긴 활주로가 하나 보였다.

미스터 윤을 만났다. 미스터 윤은 이번 여행의 가이드(이자 중심의 인물)이다. “여기서 제일 유명한(그리고 가까운) 타가 비치(Taga Beach)부터 가봅시다.” 바다가 전부고 바다가 일상인 섬이다. 미스터 윤의 말대로 하릴없이 바다부터 찾았다.

고대 차모로족의 족장이었던 타가와 그의 가족만 출입할 수 있었던 타가 비치
고대 차모로족의 족장이었던 타가와 그의 가족만 출입할 수 있었던 타가 비치

타가 비치는 멀리서 봐도 옥빛 바다가 압도적이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보니 투명하다. 해안가 절벽 아래로 아담하고 아늑한 해변이 숨어 있었다. 파도가 오랜 시간 매일매일, 꿋꿋하게 절벽을 파낸 덕분에 그늘도 생겼다. 고운 모래 위로 투명한 바닷물이 오르내린다. 미스터 윤은 타가 비치를 고대 차모로족의 족장이었던 타가와 그의 가족만 출입할 수 있었던 해변이라고 소개했다. 어찌나 평온하고 잔잔한지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마음을 누를 수 없었던 것 같다. 절벽 아래 그늘 진 바위에 앉아 한동안 ‘바다 멍’을 때려 보니 그 이기적인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마냥 앉아서 피리나 불면 좋겠다 싶었다.

타촉냐 비치는 티니안 사람들이 가장 편안하게 방문하는 곳이다. 그저 앉아서 쉬어도 좋다
타촉냐 비치는 티니안 사람들이 가장 편안하게 방문하는 곳이다. 그저 앉아서 쉬어도 좋다

사람이 제일 많이 모이는 곳(=만만한 곳)은 타촉냐 비치(Tachogna Beach)라고 했다. 뭐 대단히 멀리 있나 싶었는데 타가 비치 바로 옆으로 이어진 해변이다. 타촉냐 비치의 주말 오후는 바비큐 파티를 하기 위해 어슬렁어슬렁 모인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티니안 사람들은 바다에서 놀고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바다에서 잡은 생선으로 회를 뜨거나 굽거나 쪄서 먹고 있었다(물론 고기와 소시지도 빠지지 않았다). 먹고 마시는 사이사이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농담이 오고 가는 듯했다. 그 틈을 비집고 우리도 주섬주섬 자리를 폈다. 티니안에서 제일이라는 맛집, JC 카페에서 포장해 온 버터 프라이드 치킨과 햄버거를 펼쳐놓고 앉아 우걱우걱 먹으며 바다를 본다. ‘타촉냐’는 차모로족 언어로 ‘앉아서 쉰다’라는 의미다. 여기 진짜 좋다, 그치? 하지만 쉴 새가 없다. 한 손은 파리를 쫓느라 바쁘다. 

 

●바다에게 그린 라이트 


티니안 북부에서 가장 유명한 바다는 ‘블로우 홀(Blow Hole)’이다. 산호초 구멍을 뚫고 물줄기가 솟구쳐 분수를 만든다. 바람을 타고 미세한 물방울이 흩날린다. 그늘 하나 없이 볕이 뜨거운데 시원하다. 아무렇게나 뻥뻥 구멍이 뚫린 돌 바위를 뒤뚱뒤뚱 걷는 게 조금 어려울 뿐. 

자꾸 궁금해지면, 그건 그린 라이트다. 하릴없이 찾은 바다가 자꾸만 궁금해졌다. 바다라고 다 같은 바다는 아니었다. 바닷물 색부터 모래, 바람의 세기, 자라는 나무와 풀이 서로 다르게 어우러져 각각의 다른 풍경을 만든다. 파도가 내는 데시벨도 다르다. 발길이 닿은 모든 바다 곁에서 우와, 우와, 대박, 대박을 연발했지만, 풍경이 다르니 감흥도 미세하게 달랐다. 또 다른 바다도 궁금하다 말하니 미스터 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운전대를 잡는다.

티니안에서 가장 긴 해변은 롱 비치(Long Beach)다. 롱 비치 오른쪽으로 바위 틈을 비집고 엉금엉금 기어 들어가면 이름만 치명적인 누드 비치(또는 프라이빗 비치라고도 한다)가 나온다. 눈앞에 바다 빼고 양옆과 뒤가 높은 절벽으로 막혀 있다. 정말 홀딱 벗고 수영해도 아무도 모를 것 같은데 그래서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블로우 홀로 가는 길은 구멍이 숭숭 뚫린 돌 바위를 걸어야 한다. 초록색 정글 아니면 바다가 전부인 섬의 풍경
블로우 홀로 가는 길은 구멍이 숭숭 뚫린 돌 바위를 걸어야 한다. 초록색 정글 아니면 바다가 전부인 섬의 풍경

●푸른빛 세상의 호흡법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지나가는 소나기는 아닌 듯했다. 바다 아니면 정글인 섬에서 외지인은 갈 길을 잃었다. “바다는 오히려 괜찮아요.” 스쿠버 다이버이기도 한 미스터 윤이 말했다. 티니안에서 비를 피해 즐길 수 있는 곳은 이번에도 바다다. 타촉냐 비치 속을 걷는 것. 발만 담가도 물속에서 헤엄치는 열대어 수십 마리가 훤히 보이는 맑은 바다. 하늘이 흐려도 참방참방,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 그 안의 세상이 자못 궁금하던 참이긴 했다. 

물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이다. 바다 바깥의 세상이든, 바닷속 세상이든, 살기 위해선 호흡해야 한다. 호흡이 멈추면 다 끝이다. 산소통 없이는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수 없다는 생각은 그래서 불안감을 키웠다. 몸에는 힘을 빼고 입으로만 강하고 깊게 그리고 천천히. 귀가 먹먹해지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닷속 기압에 적응할 것.

바닷속 세상에서 호흡하는 법에 익숙해지니 그제야 몰랐던 세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리가 여기 있네, 니모는 어디에 있지? 운 좋으면 거북이도 볼 수 있다던데. 혹시 고래상어가 나오면 어쩌지. 산호초가 이렇게 예쁘구나. 푸른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세상. 들어가지 않으면 절대 몰랐을 세상이 펼쳐졌다. 

미스터 윤은 깊고 푸른 바다가 좋아 이 섬, 저 섬을 헤매다 14년 전 티니안에 정착했다. 티니안 바다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가족들에게 티니안에서 한 달 살기를 해보라고 보내 놓고는 홀로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날아왔다고. 무모해 보였지만 충동적인 결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매일 마주하는 티니안의 모든 바다가 여전히 좋다는 걸 보니. 그리고 생각했다. 티니안 바닷속 세상에 진심인 그를 따라 호흡할 수 있었으니, 우리는 참 운이 좋았다고. 

 

●세상에 이런 새가 

알렉스가 코딱지만 한 고추를 건넨다. 알렉스는 미스터 윤의 가장 가까운 친구다. “이거 엄청 매워, 아주 조금만 고기 위에 얹어 먹어 봐.” 나 한국인인데? 맵부심을 부리자 알렉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앞니로 살짝 깨물어 오물오물하니, 5초 만에 알렉스가 기대했던 반응이 올라온다. 작은 고추가 진짜 맵네? 북마리아나제도에서 가장 매운 고추, ‘돈네 살리(Donne’ sali) 고추’다.

북부 정글에서 찾아낸 돈네 살리 고추. 새끼 손톱처럼 작은 고추가 꽃처럼 열렸다. 누구나 따 갈 수 있지만 마이크로네시안 찌르레기가 먹을 고추는 남겨두는 게 미덕
북부 정글에서 찾아낸 돈네 살리 고추. 새끼 손톱처럼 작은 고추가 꽃처럼 열렸다. 누구나 따 갈 수 있지만 마이크로네시안 찌르레기가 먹을 고추는 남겨두는 게 미덕

미스터 윤은 이 고추를 먹고 사는 새가 있다고 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이렇게 매운 걸 먹는 새가 있다고요? 가이드님이 거짓말하시면 어떡해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짜다. 취향 한 번 독특한 새의 이름은 마이크로네시안 찌르레기(Micronesian Starling). 북마리아나제도와 마이크로네시아, 팔라우 등에서 과일과 씨앗 등을 먹고 산다. 찌르레기 뱃속에서 미처 소화되지 못하고 배설물 속에 섞여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고추 씨앗은 포근한 흙과 물, 햇빛의 도움을 받아 정글 속에서도 무럭무럭 생명을 틔운다. 물론 앞마당에서 직접 씨앗을 뿌려 키우는 집들도 있지만 이렇게 키운 고추는 크기가 좀 더 크고 맵기의 강도도 정글의 것보다 떨어진다고 했다. 역시, 뭐든 자연산이 최고지.

우리는 아침부터 미스터 윤과 알렉스를 따라나섰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초록색 정글로 파고드는 아침이다. 어디쯤인가. 두 사람은 GPS도 잡히지 않는 비포장도로를 척척 안내한다. 길은 알고 가는 것이냐, 길을 잃으면 어쩌냐 했더니 그래 봐야 티니안 안에 있는 거 아니겠냐며 알렉스가 대수롭지 않게 웃는다. 허리까지 자란 풀과 옆으로 반쯤 누운 나뭇가지를 엉거주춤 헤치며 걷다 보니 늪지대와 악어 떼가 나타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글 숲에 들어왔다는 생각에 미친다.

찾았다! 앞서가던 알렉스가 외쳤다. 사방이 초록초록한 숲속, 새끼손톱만 한 앙증맞은 빨간 돈네 살리 고추가 꽃처럼 피었다. 톡, 톡, 고추만 손으로 조심스레 떼어 통에 담았다. 새빨간 고추와 아직 푸른색을 띄는 고추 가릴 것 없이 적당히 자란 고추면 된다. 그렇다고 또 전부 가져가면 안 된다. 찌르레기가 먹을 것은 남겨두고 떠나는 게 미덕이자 매너, 자연이 준 선물에 대한 인간의 성의다. 

알렉스는 머릿속이 복잡한 날엔 이렇게 숲에 처박혀 몇 시간이고 고추를 딴다고 했다. 잡념이든 현실적인 고민이든 그게 뭐든, 잠시라도 정신적 고통에서 한 발짝 멀어지는 시간. 다행히 나무가 만든 그늘 아래는 새소리만 들린다.

티니안을 비롯한 북마리아나제도에서는 이렇게 작고 소중한 고추로 핫소스를 만들어 판다. 한 마디로 특산품인데 그중에서도 이렇게 티니안 정글에서 수확한 자연산 고추로 만든 핫소스를 최고로 친다. 일반적으로 마트에서 팔고 있는 핫소스는 대체로 사람이 (나름) 대량으로 심어 수확한 고추로 만들었을 확률이 높다. 한병에 평균 8~10달러 정도다. 그렇다면 토종꿀과 비슷한 대우를 받는 티니안표 핸드메이드 핫소스는 얼마? 25~30달러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미아와 나는 같은 생각을 했다. 비싼 게 아니네.

집마다 고추장 만드는 레시피가 조금씩 다르듯 핫소스도 마찬가지다. 정통 방식은 잘 씻어 낸 고추를 물기를 털어 내 마늘과 1대1 정도의 비율로 섞고 약간의 소금간을 더해 갈아 내는 것. 어떤 집에서는 간장이나 식초를 넣어 좀 더 오래 두고 먹는다고 했다. 이렇게 만든 핫소스는 티니안 사람들에게는 만능 소스로 통한다. 생선회를 먹을 땐 간장에 살짝 섞어 찍먹, 고기를 먹을 때는 살짝 얹먹, 레몬즙에 살짝 섞어 샐러드 드레싱으로 부먹, 끓는 라면에는 칼칼함 한 스푼을 살짝 추가하기도 한다. 티니안에서 열리는 가장 큰 축제 중 하나가 돈네 살리 고추축제다.  

요즘 속에서 열불 터질 일이 많은 서울에서는 티니안에서 가져온 토종 핫소스를 꺼내는 날이 많다. 제육볶음에 반 스푼, 열무비빔국수에 반 스푼, 사천식 짜장라면에도 반 스푼(이 정도면 돈네 살리 고추축제에서 고추 많이 먹기 대회 강력 우승 후보가 아닐까 싶다). 새끼손톱보다 적은 양으로도 혀가 얼얼해지고 소변이 마려울 정도로 찌르르르 한데 이상하게도 속은 쓰리지 않다. 핫소스 반 스푼에 한껏 땀을 흘리고 입 안에 매운맛이 사라질 때쯤이면 마음속 열기도 사그라들곤 한다. 아마 마음속 한구석에 평온했던 티니안의 초록 정글을 담아 온 것 같기도 하다.

티니안 사람들은 종종 바닷가 근처에서 고기와 생선을 굽는다. 매일 저녁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티니안 사람들은 종종 바닷가 근처에서 고기와 생선을 굽는다. 매일 저녁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티니안식 TMI에 대하여 

산호세(San Jose) 빌리지 근처 부두는 해 질 무렵에도 분주했다.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하루를 털어 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그날 잡은 청새치 한 접시와 캔맥주가 빠지지 않았다. 매일매일 크게 다를 게 없는 섬 사람들의 일상. 그래서 원주민들의 눈에는 이주민이 반갑다. “헤이, 미스터 윤, 밥 먹고 가!” 낯선 여행자는 더 반갑다. 마치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우리에게도 자연스럽게 캔맥주를 내어준다. 내 이름은 디, 얘 이름은 제시야. 오늘은 애나의 생일이고…. 누구는 최근 새 차를 뽑았고, 누구는 얼마 전에 많이 아팠는데, 누구는 어디에 다녀왔다며, 크게 상관없고, 크게 궁금하지 않고, 크게 뜬금없는 이야기가 마치 크게 중요한 이야기처럼 여행자에게까지 돌고 돈다. 좁은 티니안 바닥에 옆집 밥숟가락 개수만큼이나 시시콜콜한 TMI가 넘치는 저녁. 푸근하고 생경해서 좋다. 

티니안의 추장 타가가 로타에서 옮겨왔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거대한 크기의 라테 스톤
티니안의 추장 타가가 로타에서 옮겨왔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거대한 크기의 라테 스톤

●티니안을 이해하기 위한 2가지 이야기

아들을 낳았다. 그것도 힘이 아주 센. 어느 날 아들은 손으로 게 한 마리를 잡으려고 코코넛 나무를 아무렇지 않게 뽑았다. 초인적인 힘이다. 아이가 더 크면 추장인 나를 위협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이대론 안 되겠다. 죽여야겠다. 이를 눈치챈 아들이 아버지를 피해 도망친 땅. 티니안이다. 

북마리아나제도에 오래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다. 이들은 선사시대부터 북마리아나제도를 다스려 온 차모로(Chamorro)족이며 도망친 아들은 타가(Taga). 타가는 티니안의 추장이 됐다. 아버지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 타가의 힘은 거대한 신전에서 짐작된다. 차모로족은 집을 짓기 전 라테 스톤(Latte Stone)을 사용해 기둥을 세우는데 그 기둥의 크기가 압도적인 수준이다. 게다가 라테 스톤의 채석장이 티니안이 아닌 로타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명 타가가 그 거대한 돌을 옮겼을 것이라고 짐작, 믿고 있다. 믿을 수 없는 일은 때때로 믿을 수밖에 없다. 

티니안은 1944년 미군에 점령됐다. 2차 세계대전을 끝낸 원자폭탄을 보관한 장소도 남아 있다
티니안은 1944년 미군에 점령됐다. 2차 세계대전을 끝낸 원자폭탄을 보관한 장소도 남아 있다

정글 속 활주로는 예사로운 활주로가 아니다. 평온하고 조용했던 섬은 사실 2차 세계대전 당시엔 일본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일제강점기,수많은 한국인이 강제 노역으로 끌려와 피와 땀을 흘린 곳이기도 하다. 티니안은 1944년 미군에 점령됐다. 이후 활주로에는 수많은 미군용기가 오갔고 2차 세계대전을 끝내 버린 원자폭탄을 나른 활주로로 이름을 남겼다. 활주로 근처에는 각각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2개의 원자폭탄을 보관했던 장소도 덩그러니 남아 있다.

 

●완벽하지 않았던 나의 티니안 

그래봐야 면적 약 100㎢, 인구 약 3,000명의 작은 섬이다. 티니안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는 산호세(San Jose) 빌리지에는 모든 게 다 있는데, 없는 게 많다. 왼쪽에 2층짜리 시청 건물이 보이면, 길 건너 오른쪽으로는 소방서와 경찰서, 병원이 차례대로 시야에 들어온다. 교회도 있고 학교도 있고 유일한 주유소도 있다. 올해는 티니안 최초의 드라이브 스루 카페 ‘K-타운(짐작했겠지만 사장님=한국인)’이 문을 열었고 이곳에서만 유일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판매하고 있다. 대신 스타벅스나 맥도날드, KFC와 같은 프랜차이즈들은 없다(그래서 볼일을 보러 사이판에 다녀오는 티니안 사람들은 손에 KFC 치킨 박스를 3개쯤은 들고 온다). 티니안 사람들에게 맛집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99.9%의 확률로 모두 ‘JC 카페’를 말할 게 뻔하다(근데 여기 버터 프라이드치킨은 찐이다). 

불꽃나무가 늘어선 브로드웨이
불꽃나무가 늘어선 브로드웨이

그래서 분명히 티니안은 모든 사람들에게 완벽한 여행지는 아니다. 호화로운 호텔도, 식당도 변변치 않다. 택시는커녕 스쿠터나 자전거, 버스(와 신호등)도 없다. 자연재해에도 취약하다. 누군가는 불편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시시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영락없는 시골 섬. 하지만 매일매일 색다른 바다를 마주하고, 길을 잃거나 무슨 일이 생겨도 어디선가 누군가가 나타나 어떻게든 도와줄 사람들이 있으며, 매일 밤 미쉐린 별 대신 진짜 별이 쏟아지는 곳이기도 하다. 매일 저녁 해변에서 맥주와 바비큐 파티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있는, 그게 좋아 누군가는 티니안에 둥지를 틀었다. 나는 티니안에서 마주했던 장면들을 언젠가 잊어버리면 어쩌나 걱정했고, 미아는 사이판에 크게 미련을 두지 않고 돌아왔다. 나에게 티니안은 바닷속 세상과 같았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세상. 직접 들어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세상. 이런저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세상. 티니안 사람들의 수줍은 참견이 좋았던, 나의 티니안은 그랬다. 

 

글 손고은 기자  사진 문미화  취재협조 마리아나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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