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인
노매드 미디어&트래블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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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돌아서 돈이므로 돈이 돌지 않으면 사람은 돌아버린다. 특히나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님들의 경우, 회사 통장이 마르기 시작하는 순간 입이 마르고 피가 마른다. 1년은 사계절로 구분되고 한 달은 평일과 휴일로 나뉘며 하루는 근무 시간과 퇴근 시간으로 가려지는데, 사장님들의 달력은 오직 월급날과 비월급날 두 개 뿐이니 만일 급여일을 앞두고 회사에 돈이 돌지 않게 되면 그때부터 사장의 지옥문은 활짝 열리는 것이다.

어니 J. 젤린스키는 <느리게 사는 즐거움>에서 인간이 하는 걱정의 96퍼센트는 실제 일어나지 않을 걱정이라고 말했지만 지옥의 한 가운데에서 이런 말이 사장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부처님은 초기 경전의 여러 군데에서 수행의 핵심으로 ‘즉시현금 卽是現今’ 즉,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다가올 미래를 동경하지 말며 오직 ‘지금 여기’에만 집중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번뇌에 빠진 사장에게 저 경구는 그저 ‘즉시 현금 조달’로만 읽힐 뿐이다.

올해 회사를 운영하면서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언제라고 아랍의 팔자 좋은 왕자님처럼 속 편한 적이 있었게냐만은 어느 시기에 돈이 마른 논바닥처럼 바짝 말라버렸던 것이다. 급여일은 다가오는데 통장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끊이지 않고 머릿속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만 써지는 나날이었다. 행여나 직원들에게 걱정하는 모습을 들킬세라 내 방에서 두문불출 계산기만 두드리다가, 옆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출판사 후배에게 넌지시 이런 질문을 던졌다.

“만약 너희 회사에서 한 달 월급을 못주면 넌 어떻게 하겠니?” 내 속을 모르는 후배는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한 달 정도는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안도의 숨을 휴우 하고 내 쉬는데 이어서 던지는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판다. “다만! 남 모르게 취업 사이트를 들락거리기는 하겠지요?”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급여를 받지 못한 우리 회사 직원들이 사장 몰래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여기 저기 이력서를 넣고 있는 장면이 그려졌다.

그러나 마치 영화의 반전처럼 기운이 불끈나는 일이 있었으니, 그즈음 있었던 직원과의 회식자리에서였다. 지갑에 돈이 없으면 양귀비와의 데이트도 귀찮거늘, 회사 통장이 저 지경인데 회식은 무슨 회식이냐고 속으로 구시렁거렸으나 이미 직원들에 의해 벌어진 술판이니 마지못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술김에 직원에게 물었다. “요즘 내가 어떻게 보이디?” “사장님요? 무척 힘들어 하시잖아요” “그걸 어떻게 아니? 요즘 너희하고 얼굴도 잘 마주치지 않았는데?” “아유, 출근할 때 얼굴 표정만 딱 봐도 회사 사정을 저희는 알아요”. 이때 팀장이 한마디를 했다. “사장님, 저희는 그전에 있던 회사에서 더 힘든 일을 겪었어요. 혹시 이번 달에 급여가 정상적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슨 큰 일이겠어요? 이미 그런 것에 예민할 직원들은 아니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술 집 문이 활짝 열리더니 천 마리의 말들이 내 품으로 달려오는 느낌,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 말 한마디가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아마 그 자리에 있던 직원들은 몰랐을 것이다.

월급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사장은 전쟁에서 진 병사보다 더 큰 죄를 짓는 것이라는 강박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사장 스스로 갖는다. 그런 일이 있으면 직원들이 순식간에 등을 돌릴 것이라는 의심은 어쩌면 사장이 가져야 할 도덕적 결벽증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던져주는 직원의 격려 한 마디는 그야말로 고래를 춤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래를 평생 무용수로 만들어버리는 파워가 있다.

다행히, 힘든 순간은 잘 극복됐고 내가 상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 중 단 하나도 현실화 되지 않았지만 한 해가 넘어가는 지금 내 마음 속에 남겨진 최고의 선물은 그때 직원이 던져준 보온의 격려 말이다. 살면서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는 것은 언제나 든든하고 감사하며 행복한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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