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상도(商道)가 지켜지던 1970년대
2. 한남여행사, 그 우여곡절 속으로

“일본인 관광객 1명 모객하면 직원 6명 월급이 나왔지”

""지금 인바운드 시장이 덩치만 커졌지 실속이 없다는게지. 초창기에는 해외에서 오는 인원은 지금에 비할 바가 못 됐지만 최소한 질서는 유지됐어""

한국을 찾는 외래 관광객은 날로 증가하고 있지만 정작 인바운드업계의 표정은 밝지 못하다. 2010년 하반기만 하더라도 G20정상회의로 인한 호텔수배의 산을 넘은 지도 잠시, 연평도 포격의 영향에 모객이 줄었다. 노투어피 문제 등의 비정상적 거래 관행까지 감안한다면 현재 인바운드 업계는 적신호다. 인바운드의 산증인, 한남여행사 이술한 회장은 인바운드 여행사가 24개에 불과하던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덩치는 작았을 지언정 당시는 적어도 업체간 도리가 지켜졌다. 이술한 회장은 현 인바운드의 세태를 안타까워하며, 한국 인바운드업의 역사를 하나씩 풀어 놓았다.

■‘홍보맨’에서 식품점·토산품점 사장으로

처음부터 여행업과 인연이 닿은 것은 아니었어. 원래 조미료 회사‘미원’홍보실장을 했는데, 어느날‘월급쟁이로는 안되겠다’ 생각이 들어 내 사업을 시작했어. 화공약품 공장을 운영했는데 2년만에 거덜이 나 버렸어. 그때 삼성 이건희 회장의 형 이맹희 씨가 나를 제일제당 홍보부장으로 스카웃을 했지. 1년만 일을 해달라는 거야. 미원과 경쟁업체인 곳에 들어가려니 처음에는 갈등이 됐지만, 당시 사업을 접은 상태였기 때문에 제안을 받아 들이게 됐지. 제일제당에서 한 3년간 일을 했어.

그러다가 그만두고 1972년도에 반도 아케이드에 식품점을 열었어. 과자를 팔았는데, 식품회사에서 일을 했으니 해태며 롯데며 그쪽 홍보 담당자들이 홍보용 과자를 무료로 주더라고. 과자 장사만하다가 안되겠다 싶어 옆 가게를 인수했어. 당시 반도 아케이드에 일본인들이 많이 왔거든. 그래서 인삼이나 한과 등 토산품을 같이 팔기 시작했지.

■토산품점 통합 끝내 무산

1970년도에는 정식 등록된 토산품점이 44개에 불과했어. 전국적으로 영세한 곳까지 합치면 100개였고. 당시 내가 관광협회 이사를 맡았는데 난립하고 있는 토산품점을 한 데 모아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운영해 보고자 했지. 1층에는 공장시설, 2층에는 매장을 만들어 전시 판매하고 3층은 식당 넣고 말이야. 자수정·목각·나전칠기 등 전통공예 하는 현장을 외국인들이 보면 너무 좋잖아. 김포공항이 가까우니 관광코스에 넣을 수도 있고. 실제로 계획이 구체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어. 박정희 정권 때였는데 청와대랑 직접 얘기했거든. 여의도에 63빌딩 옆 공터가 있었는데 정부가 이곳을 특혜분양 해주기로 했어. 또 관광진흥자금 20억원을 저리로 지원하기로 약속도 받았고.

그런데 문제는 토산품점 44개가 서로 단합이 안되는거야. “지금 장사 잘 하는데 왜 굳이 일을 벌이냐”,“ 법인으로 하면 개인 재산 안된다”, “이 회장 혼자 좋은 일 하는거 아니냐”등 잡음이 너무 많아서 결국 사업을 자체 반납해 버렸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안타까워. 토산품 시장 어떻게 됐냐고? 다죽어 버렸잖아. 가격 비싸고 영세하지 또 새로운 상품 개발도 안되고 말이야. 토산품점이 난립하니까 서로 여행사에 로비하고 선수금 걸고 그랬잖아. 여행사 운영할 때도 비용을 줄이고 주재원 공동유치를 하자고 한 적이 있었어. 인바운드업계가 워낙 주재원 보내는 데 비용 출혈을 겪잖아. 그런데 결과는 토산품점 단합 실패
한 것과 똑같이 무산됐지.

■ 인바운드업계를 향한 쓴소리

인바운드도 토산품점 상황이랑 다를 게 없지. 지금 정상적인 요금으로 운영하는 데가 없어요. 그거 고집하면 손님이 없거든. 인바운드가 환율에만 의존하고 있어. 지금처럼 환율이 괜찮으면 문제없지만 환율 나빠지면 쉽게 무너지는거야. 환차이익이라 해봐야 수익이 크지 않잖아. 서로 랜드피 낮추는데 인바운드업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겠어?

지금 인바운드 시장이 덩치만 커졌지 실속이 없다는 게지. 초창기에는 해외에서 오는 인원은 지금에 비할 바가 못 됐지만 최소한 질서는 유지됐어. 일본이 1964년도 도쿄 올림픽 치르고 해외여행이 자유화됐어. 1970년대 초반에 일본 관광객 1명 모객하면 인바운드여행사에 순이익이 3만원이 떨어졌다고. 당시 보통 직장인의 한달 월급이 4,500원 이었어. 번듯한 양옥집 한 채가 200만원 하던 시절이었고 말이야. 일본 관광객 1명 유치하면 직원들 6명 월급을줄 수 있었던 게지. 10명 유치하면 60명 월급이고. 한 달에 20~30명만 모객하면 월세내고 운영이 다 된다는 뜻이지. 당시 큰 단체는 평균 200~300명이었어.

인바운드가 그렇게 유지됐던 것은 정부가 어느 정도 통제를 가했기 때문이었지. 박정희 정권 때 관광 담당 비서관이 생길 정도로 관광에 관심이 높았지. 외화 유치에 열심이었던 시절이었으니. 여행사가 가격을 덤핑해서 적자내면 남산에 끌려 갔지. “너 그렇게 싼 가격에 외국인 유치하는데 매국노 아니냐?”하면서 말이야. 한번 끌려 갔다 오면 무릎 다 까지고 크게 혼줄이 나는거지. 개인 인권은 억압됐어도 전체 시장 전체로 볼 때는 그때가 환경이 좋았어. 1970년대 아웃바운드 회사도 중동붐 때문에 장사하기 좋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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