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인
노매드 미디어&트래블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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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에 출판사 여직원이 문자를 한 통 보냈다. “선생님, 왜 사장님들은 등산을 좋아하는 거예요? 그것도 꼭 직원들 다 끌고요. 우리 사장님이 1월1일 신년 등산하재요 ㅠㅠ” 정초에 전기장판 뜨겁게 올려놓고 감자칩을 씹으며 미드나 폭풍 질주하겠다고 계획했던 그녀의 꿈은 산 좋아하는 사장님 때문에 박살이 난 것이다.

나이 들면 산을 좋아하게 되는 거야 자연법칙에 가까운 보편적 현상이다. 인간관계에 지치고, 은근히 건강관리에 신경 쓰일 때, 말 없는 산을 말없이 오르는 것은 정신건강과 몸 건강에 아주 그만이다. 게다가 주름이 늘어나면 감성도 세밀해져서 청춘 때 무덤덤했던 나무도 이제는 자꾸 좋아진다.

더구나 매달 한 번씩 산통을 치르듯 월급 지급으로 골머리를 썩고, 치통을 치르듯 몇몇 직원들로 속을 썩으며, 회사의 미래를 생각하면 세 번은 희망적이고 일곱 번은 절망적인 사장님들이니 한 발 한 발 자기 힘으로 천천히 산을 오르며 쉬고 싶을 때 쉬고 가고 싶을 때 나아갈 수 있는 이 산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정이 가는 대상이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를 직원과 공유하려는 오지랖 넓은 홍익사장의 정신이다. 내가 몇 년 전 짧은 기러기 생활을 결정할 때, 옆에서 그 결단을 한사코 말렸던 퇴직 여직원은 걱정이 한 바구니 담겨있는 눈빛으로 이렇게 말을 했더랬다. “내 친구 회사 사장은 몇 년 째 기러기 아빠인데, 그 회사 직원들이 다 죽으려고 해요. 그 사장님이 퇴근 후에는 직원들을 불러 술을 마시고 주말이면 함께 영화를 보자고 하는 등 하도 시도 때도 없이 직원들을 불러내서 직원들이 고사를 지냈대요. 사모님이 빨리 귀국하게 해달라고요.”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러기가 됐고, 그녀의 우려와 달리 그녀 친구의 사장을 따라 하지 않았다. 나는 직원들이 아니어도 혼자 놀 수 있는 꺼리가 무궁무진했고 같이 놀아줄 사람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장님이 이렇게 복 터진 팔자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젊어서 열심히 일했으니 취미를 누릴 여력도 없었을 것이고, 늙어가면서 친구도 떠나는 법이니 이제는 회사, 직원, 그리고 TV가 전부인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이 노릇을 어찌할까? 사장님을 쥐어 패며 정신을 차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몇 달 동안 빈방에 가둬둔 채 군만두만 먹이며 반성하게끔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 아쉬운 놈이 우물 판다고 산 좋아하는 사장의 마음을 헤아리며 오순도순 사는 것이 “최선입니까?”의 정답일 테다.

직원과 등산을 하자는 요구가 거의 매 주 표출된다면 이건 위의 기러기 사장처럼 처절하게 외로운 사장의 몸부림이니 좀 더 진지하고 심도 높은 대화의 자리가 꼭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날에, 직원과 등산을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경우라면, 글쎄, 이런 것을 문제라고 할 수 있나 싶다.

아마도 그 사장은, 새해를 시작하면서 등산을 통해 직원들과 좋은 공기도 마시고 덕담도 주고받으며 파이팅도 외쳐보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직원들과 정상을 함께 밟으며 우리 회사도 꼭 이렇게 정상에 서보자는 마음을 공유하고 싶었을 것이다. 왜? 이유 없다. ‘파이팅’, ‘정상’, ‘가족’ 같은 단어는 명함에 사장이라고 쓰인 사람들이 예외 없이 애정하는 키워드들이다.

이러하니 설령 미드를 못보고 개 끌려 나오듯 했더라도, 그리하여 앞에 가는 사장의 궁둥이에 벼락이라도 꽂혔으면 하는 증오심이 등산 내내 솟더라도 이왕 간 산행에서는 철저히 포커페이스하고 씩씩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이 이쁨 받으며 월급 받는 자의 행동양식이다. 아주 발랄하고 힘 있게 워킹을 하며 등산을 즐기는 듯 한 모습을 보인다면, 당신 사장님의 마음 속에는 건강한 젊은이를 향한 호박 같은 믿음 덩어리가 뭉근하게 생겨날 것이다.

또한 면접의 자리거나 사장님과의 술자리에서, “자네, 등산을 좋아하나?”라는 질문을 받거들랑 주저 없이 대답하고 우렁차게 발사하라. “그렇습니다. 제 부친은 심마니셨고 조부는 땅군이었습니다!” 희한하게도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무조건 절대적인 동질감과 신뢰를 갖게 된다는 사실, 당신의 처세 목록에 밑줄 한 줄 그어도 좋을 팩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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