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일
(주)여행이야기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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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임진왜란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7년 동안 이어진 전쟁은 참혹한 피해 때문에 왕조의 기초부터 흔들어 놓았다는 점에서 조선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기준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새해, ‘임진년’인 2012년을 예사롭게 생각하지 못할 듯 하다.

그렇다면 잊을 수 없는 전쟁을 겪은 다음에 맞이한 과거 임진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60년마다 돌아오는 임진년 기사를 살펴보니 조선시대 내내 그 충격은 어마어마했던 모양이다. 주요한 사건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1592년(선조 25) 왜군 20만 조선에 침입. 임진왜란 일어남
1652년(효종 3) 경기도에서 대동법(특산물을 쌀로 바치는 제도) 실시
1712년(숙종 38) 청나라와 백두산 경계표지 세우는 일 합의. <징비록>이 일본에 들어가지 않도록 책 수출 금지령 내림
1772년(영조 48) 조헌, 이순신, 송상현의 제사를 받드는 후손을 관리로 뽑음
1832년(순조 32) 서양배가 나라 곳곳에 나타나 통상 요구
1892년(고종 29) 동학교도가 삼례에서 집회를 엶
1952년 이승만 대통령 부산에서 정치파동 일으키고 발췌개헌 통과

120년 뒤에 맞는 임진년에는 왜란 당시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 교훈으로 삼으려고 했던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에 들어가는 걸 막으려는 기사가 보인다. 180년이 지난 해에도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운 후손들을 특별 채용하고 있다. 30년만 지나도 세대가 바뀌는 탓에 어지간한 일들은 잊어버리기 쉬운데 그 여섯 배의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 일을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전쟁 뒤 420년이 지난 지금 적는 이 글도 그런 기억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보여주는 셈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행했던 옛 기억은 긴장감으로 되살아나 긍정적인 영향도 끼친 듯 하다. 전쟁이후 어려워진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대동법의 시행, 영토를 확정짓는 백두산정계비 설치 등 경제, 외교 면에서 중요한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러나 200년이 훨씬 지나면서 임진년은 그저 기록 속에만 남아 있는 듯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오히려 나라 안팎이 어수선해진 듯 하다. 황해도, 충청도 곳곳에서 서양 배가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더니 그 60년 뒤에는 전국의 백성들이 보은에서 동학의 이름으로 집회를 열고 개혁을 요구하는 일이 일어났다. 불안한 기운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지배층이 적절한 대응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심지어 다음에 맞은 임진년에는 동족상잔의 전쟁 와중에 민족의 상처를 치유하기보다 자신의 권력을 연장하려는 독재자의 욕심으로 한국 현대 정치사에 최악의 선례(부산정치파동, 발췌개헌)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그 후유증은 수 십 년 동안 이어졌다.

그렇다면 새롭게 맞이하는 2012년은 어떠할까? 이전과 달리 여러 면에서 상황이 좋고 느낌 또한 좋다. 다시 60년이 지나는 동안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 정치의 민주화와 경제의 발전은 많은 나라가 부러워할 정도가 되었으니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다시 둘러보면 세계적인 경제 불안이 이어지는 가운데 북한은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나라 안팎의 여러 문제는 현명한 대처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관료, 지배층, 정치지도자보다 국민의 책임이 중요해졌다는 면에서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의 손끝에서 나오는 지금의 정치제도 덕분이다. 마침 총선과 대선이 올해에 있다.

편안할 때 어려움을 생각하라는 말이 있다. 1592년에도 모두가 이순신 장군처럼 미리 걱정하고 준비했더라면 도요토미는 감히 현해탄을 넘으려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2012년, 임진년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고민하며 행동해서 나중에 어려움을 기회로 삼은 해였다고 평가 받았으면 좋겠다. 좁게는 나와 우리 회사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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