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글·사진=Travie Writer 노중훈

칠레에서의 첫 여정을 담당한 것은 수도인 산티아고가 아니라 산티아고 외곽의 와이너리였다. 주인공은 칠레의 국민 양조장, 콘차이토로. 별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생산되는 와인의 수준이 상당할 뿐만 아니라 시음과 편의 시설을 잘 구비하고 있어 연중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주말이면 이곳으로 와인 나들이를 나오는 칠레 사람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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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을 따라 호텔, 리조트, 별장 등이 빼곡하게 들어찬 휴양도시 비냐 델 마르

■국민 양조장에서 만난 악마

칠레 와인의 시작은 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6세기 중반 기독교의 포교를 위해 스페인에서 포도 묘목을 들여온 것이 ‘탄생의 기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칠레는 기본적으로 포도의 생장에 적합한 기후와 토지를 갖추고 있다. 게다가 땅값과 임금도 헐한 편이다. 그러니 양질의 와인이 나올 수밖에 없다. 19세기 말 유럽의 포도밭을 초토화시킨 해충 ‘피로키세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던 점도 칠레에게는 행운으로 작용했다.

칠레 와인이 국제적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본격적으로 품질 향상에 공을 들이게 된 시기가 1980년대 중반. 그전까지는 내수용의 신맛이 강한 와인이 주종을 이뤘다. 앞선 기술과 최신 설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와인 농가들은 수출용의 고품질 와인을 속속 선보이기 시작했고, 세계적인 와인 박람회와 경연 대회에서 연거푸 수상하면서 칠레 와인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산티아고(Santiago)에서 불과 수십 km 떨어진 곳에 이름난 와이너리들이 산재한다. 그중 제일 유명한 곳이 앞선 말한 콘차이토로(Concha Y Toro). 산티아고에서 차로 40~5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콘차이토로의 와이너리 투어에 참가했다. 사람 좋은 인상의 현장 스태프가 콘차이토로의 역사와 생산 현황 등을 살뜰히 짚어주었다. 프랑스의 샤토를 연상시키는 건물들과 광활하게 펼쳐진 포도밭이 시각적인 기쁨을 선사했다. 녹색의 기운이 충만한 포도밭에서는 갓 마개를 연 화이트 와인의 청량감이 한꺼번에 번져 나오는 듯했다.

콘차이토로에서 선보이는 와인 중에 가장 이름난 것이 바로 ‘악마의 셀러’라는 뜻의 카시예로 델 디아블로(Casillero del Diablo)다. 왜 하필 악마라는 표현을 ‘신의 물방울’에 쓰게 됐는지는 와인 저장고에서 들을 수 있었다. 와인이 자꾸 없어지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주인은 어느 날 지하 저장고에 몰래 들어왔다가 자신의 일꾼들이 와인을 훔쳐 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에 주인이 귀신 소리를 내자 그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쳤고, 이후로는 와인이 도난당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기념하려는 듯 콘차이토로는 와인 저장고 벽면에 악마의 그림자가 비치도록 설치해 놓았다. 와인의 향기에 취해서인지 붉은색 조명의 도움을 받고 있는 악마의 모습이 무섭기는커녕 귀엽기만 했다.

■영원불멸의 시인이 살던 집

산티아고에서 68번 국도에 올라 서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목적지는 비냐 델 마르(Vina del Mar)와 발파라이소(Valparaiso). 2시간가량 달렸을까. 차창 밖으로 바다를 낀 해안 도시 특유의 풍광이 따라붙었다. 칠레의 아카풀코라는 찬사에 걸맞게 비냐 델 마르의 바닷가에는 대형 호텔과 리조트와 콘도미니엄이 즐비했다. 현지 가이드는 여름철인 12월부터 3월까지는 모든 숙박 시설의 객실이 동날 정도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한다고 귀띔했다.

휴양도시 비냐 델 마르는 무엇을 하는 것보다 무엇도 하지 않는 쪽이 더 어울리는 곳이었다. 그저 해변에서, 리조트에서 한갓지게 쉬어가면 그뿐이었다. 비냐 델 마르에서 발파라이소로 건너가기 전 유일하게 들른 곳이 고고학박물관이었다. 내부까지 들여다본 것은 아니고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 유명한 이스터 섬의 모아이상을 마주했다. 잠시 눈을 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니 칠레 해안으로부터 3800km, 대한민국에서 1만6000km나 떨어져 있는 이스터 섬의 환영이 불쑥 떠올랐다. 그리고는 아득한 세월 동안 외로운 하늘을 이고 갖은 풍상을 견뎌낸 그곳의 유적들과 침묵의 대화를 시작했다.

비냐 델 마르의 ‘옆 동네(9km 떨어져 있다)’ 발파라이소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비냐 델 마르의 바다에 휴양지의 여유가 넘실거렸다면, 발파라이소의 바다에서는 신산스런 삶이 묻어 있는 항구의 짠 내가 물씬했다. 2003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발파라이소에서 가장 압도적인 풍경은 언덕땅의 경사면을 따라 빼곡하게 들어찬 색색의 집들이었다. 귀를 기울이면 저마다 애연한 사연을 품고 있지 않은 집이 없겠지만, 그 낱낱의 집이 모여 이룬 집들의 단체 풍경은 묘한 감동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이방인의 어쭙잖은 감상일 것이다. 이곳에 살았던 영원불멸의 시인 네루다는 발파라이소를 두고 ‘가난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시인이자 정치가이자 공산주의자였으며, 가장 서정적인 연애시와 가장 뜨거운 서사시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던 네루다. 그가 발파라이소에서 기거했던 언덕 위 5층짜리 집 라 세바스티아나는 박물관으로 쓰임새를 달리하고 있었다. 일평생 바다와 배에 대한 연정을 간직하며 살았던 네루다의 집답게 실내 곳곳에서 드넓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가 글을 쓰고 밥을 먹고 잠을 잤던 서재와 식당과 침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삶의 풍성함과 자연의 만장함을 읊조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강물처럼 흐르는 사랑을 간결한 시어로 뽑아냈던 그의 정신이 만져지는 듯했다. 그가 친구들을 불러내 담소를 나눴던 공간에서는 우편배달부 마리오와 네루다의 아름다운 우정을 그린 영화 <일 포스티노>의 한 장면이 불현듯 눈앞에 펼쳐졌다.



■travel info
페루 리마와 마찬가지로 칠레 산티아고의 시티 투어 역시 아르마스 광장에서 비롯된다. 광장은 대성당, 중앙우체국, 시청사 등의 건물에 둘러싸여 있다. 걸어서 수 분 거리에는 대통령궁이 위치한다. 산티아고 중심지에서 북동쪽으로 우뚝 솟아 있는 산크리스토발 언덕은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언덕 정상에는 초대형 마리아상이 세워져 있다. 네루다 마르 스위트(www.hotelneruda.cl)는 비냐 델 마르에 자리한 호텔. 객실 설비는 단출하지만 지중해풍의 느낌이 난다. 호텔 옥상에 야외 풀장이 설치돼 있다. 일광욕을 위한 비치 의자도 놓여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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