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숙 맥스컴 대표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두고 굳이 시간 들이고 돈 들여가며 외국까지 날아가 유명하다는 트레킹 코스를 걸어야만 할까?”
제주 올레 길을 몇 차례 걸을 때마다 끊임없이 맴돌던 생각이다. 해외로 떠날 여건이 안 된다면, 세계 어느 곳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수려한 경관 속에 오밀조밀한 삶을 품고 있으며 정감 넘치는 올레 길을 반드시 풀코스로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몇 해 전 10월 말, 2박3일 일정으로 올레 1, 2 코스에 올랐다.  15.6km의 1코스는 제주 올레 길에서 가장 먼저 열린 코스로 혼자 걸어도 지루할 겨를 없이 오름과 바다가 이어지는 ‘오름-바당 올레’다. 아담한 시흥초등학교에서 출발해 사시사철 푸른 들을 지나 말미 오름과 알 오름에 오르면 성산 일출봉과 우도, 조각보를 펼쳐놓은 듯한 들판과 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검은 돌담을 두른 밭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는 들녘의 모습은, 색색의 천을 곱게 기워 붙인 조각보처럼 예뻤다.

15.6km를 내처 걷다 보면 동시에 몇 사람의 ‘올레꾼’이 따로 또 같이 걷기도 하고, 몇 시간 동안 사람 구경 한번 못한 채 혼자 길을 걷기도 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혼자 걷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사람이라도 올레꾼을 만나면 친지를 본 듯 몹시 반갑다. 남녀노소 관계없이 말을 건네는 것도 스스럼이 없어진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서울에서 왔습니다.”, “저는 제주에 부임한지 몇 달 안됩니다. 모처럼 작정하고 올레 길을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정말 아름답네요!”
 
처음 보는 남자와의 이런 대화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일단 공감하는 대상이 확실하니까. 경계하거나, 소위 수작을 걸어보려는 마음은 애당초 없었고 그렇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서울 한복판에서라면 이런 대화가 어디 가당키나 한가. 앞서 가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배낭을 뒤지더니 초콜릿을 한 조각 내밀었다. “피곤하실 때 드십시오.” 초보 올레꾼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조금 상처가 난 귤 하나를 답례로 건넸다. “감사합니다. 못생긴 귤이지만 목마를 때 드시지요.” 나 역시 인심을 쓰려 해도 줄 거라곤 이것 밖에 없었다.
 
종달리 소금밭을 지나 목화휴게소를 지나면 약 9km 지점이니 20리 길을 걸은 셈이다. 1시 반쯤 ‘시흥 해녀의 집’이라는 식당에 들어가자 올레꾼들이 빼곡히 들어앉아 맛나게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초콜릿을 건네준 이도 있어 눈인사를 나눴다. 이 집에서 유명하다는 전복죽을 시켰다. 족히 2인분은 될 듯싶은 전복죽의 양에 놀라고 맛에 또 한번 놀랐다. 속도 든든 마음도 든든하니 이제 출발해 볼까, 하며 신발 끈을 고쳐 매고 계산대로 갔다. 헌데 카운터에서 하는 말이 그 ‘초콜릿 남자’가 이미 계산을 마쳤다는 것이다! 무슨 수로 어떻게 신세를 갚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길을 나선지 한 시간쯤 되었을까, 답례할 다른 방법을 생각해낸 나는 그제야 마음이 가벼워졌다. ‘초콜릿 남자’가 내게 한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밥값을 꼭 하겠노라고.
 
성산리 광치기 해변에서 출발한 16.2km의 2코스는 고성, 대수산봉, 혼인지를 지나 온평리 바닷가까지 연결된다. 물빛 고운 바닷길에서부터 잔잔한 저수지를 낀 들길, 그리고 산길까지 색다른 매력의 길들이다. 마을 골목길을 자주 지나게 되는 2코스에는 농장 입구나 집 앞에 감귤을 한 보따리 비닐봉지에 담아 2,000원에 내다파는 곳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 양에 비해 이런 값이면 후하다 못해 거저나 다름없다. 더구나 돈 받는 사람도 없는 무인 판매다. 한 봉지 양이 너무 많으니 배낭이 무거워질까 겁나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정도다. 나는 봉지에서 세 개만 꺼내 한 봉지 값을 돈 통에 넣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올레 길에서 몸으로 깨닫고 새긴 교훈이 있다. 반드시 짐을 가볍게 할 것, 그리고 필요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하교하는 자그마한 초등학교를 지날 때였다. 재잘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꼬맹이들을 향해 미소 지으니 한 아이가 쪼르르 앞으로 달려와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는 이에게 인사하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처음 보는 낯선 내게 인사를 건넨 것이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시키지도 않은 인사를 먼저 하다니! 신통방통하여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인적 없는 동네 골목길에서 만난 초로의 무뚝뚝한 트럭 기사는 차를 세운 채 뚜벅뚜벅 앞으로 오더니 감귤을 한 주먹 쥐어주기도 했다. 제주의 청정한 기운이 스미어 누구도 경계하지 않던 내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 것일까? 이 황홀한(!) 경험 이후 나는 이따금 가까운 친구들에게 말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꽃처럼 아름답단다.”   

강문숙은 여성지 객원기자를 지냈고 관광공사에서 3년 근무한 경력이 있다. 리빙뉴스를 거쳐 샤프항공에서 노스웨스트항공 한글판 기내지 편집장, 노스웨스트항공 홍보실장을 역임했다. 현재 ‘맥스컴’이라는 홍보대행사 대표이며, 관광 분야에서는 유레일패스를 PR하고 있다.
 
*강문숙은 여성지 객원기자를 지냈고 관광공사에서 3년 근무한 경력이 있다. 리빙뉴스를 거쳐 샤프항공에서 노스웨스트항공 한글판 기내지 편집장, 노스웨스트항공 홍보실장을 역임했다. 현재 ‘맥스컴’이라는 홍보대행사 대표이며, 관광 분야에서는 유레일패스를 PR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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