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문명의 진면목은 「장식」
세계도자기 박람회 핵심 기획은 「문명과 도자기전」이었다. 세계 34개 소장기관이 출품한 2백 50점의 명품 진품을 시대와 지역별로 정리한 매우 보기 드문 전시회였다. 첫째칸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 지중해 그리고 중국과 한국 일본의 고대 토기로 꾸며진 「문명여명기와 도자기」였고, 둘째칸은 수, 당, 송으로부터 원, 명, 청대에 이르는 中國자기와 한국의 고려, 조선자기,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의 일본 자기의 독특한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주제로한 「동양도자(陶磁)의 미」로서 그 특성을 비교하여 미적 구조를 체계화한 것이였다.
그리고 셋째칸에서는 특이한 모티브를 구성하고 있는 이슬람세계와 유럽자기, 그리고 넷째칸을 「도자의 동서교류」, 다섯째칸을 「남미와 북미의 도자」, 끝으로 「도자기의 공업화와 개성화」로 문명사 이해에 중점을 둔 무게가 실린 전시회였다. BC 4,000년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적색마연토기호(赤色磨硏土器壺)로부터 1929년 미국에서 제작된 진사유(辰砂釉)사로매상(像)에 이르기까지 무려 6,000년에 걸친 세계도자기의 흐름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실로 감격적인 전시였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전시회가 편년적(編年的)이었거나 명품소개에 치우쳤던데 비한다면 정말 획기적인 기획이자 대단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문양과 조형을 비교하면서 차이점보다 돋보이는 유사점 발견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어서 더욱 그 기획이 고급스러웠다. 문명의 매개라 할까 창조력이라 할까 신비로운 그 무엇이 작용하여 인간의 지혜를 같은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했다. 그것이 기술진화를 촉진하는 힘이 되기도 했다는 점도 읽을 수 있었다.
과학문명의 발전에 비하면 도자기의 6,000년은 너무 농도가 진하다. 과학이 거창하고 실용적인데 비해 예술이 조밀하고 이상적인 것처럼 도자기는 문양 하나에 조형 하나에 숱한 세월을 농축하고 있어 외모의 변화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면 도자기문명은 형상의 문명이라기 보다 채색의 문명이라 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이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신석기시대부터이다. 긴 인류의 역사적 과정에서 볼 때 사람이 토기를 만든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의 구획점이다. 전시회는 그 선상에서 토기문명을 이어간 한 점 한 점의 질그릇을 엄선해 문명여명기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조형미를 다듬어 그 생명을 이어간 진화의 모습도 그려주었다.
「6,000년의 도자기 문명」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불굴의 정신세계였다. 도자기의 아름다움은 조형과 장식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조형이 실용과 실리에 끌리는 반면 장식이 완숙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생명을 이어가기 때문에 도자기문명의 중추적 요소는 장식의 예술성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 조형에 있어서 독창적인 미를 창출하지 못하여도 장식에 있어서 개성을 표출하는 미의 기본을 살려가는 것으로 도자기문명은 그 생명을 이어온 것이다.
좀 이야기가 비약한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성경이 전하는 인간의 본질에서 도자기문명의 정신세계를 더듬어 보는 것이 무익한 일은 아닐 것이다.
구약성서는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고 한 것이 그 말이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을 닮았다고 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한 성경귀절이 그 말이다. 하나님도 사람처럼 생겼을 지도 모른다.
사람이 토기를 만든 것은 필요에 의한 필연적인 것이다. 토기는 하나의 형태에 불과하다. 사람이 그 토기에 불어 넣은 「생명의 기운」은 하나님처럼 아름다움으로 장식하는 것이다. 사람의 감성과 지성과 이성은 하나님을 닮았다. 흙으로 만든 질그릇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가라츠야키(唐津燒)의 13대 나카사토(中里太郞右衛門)씨가 들려준 명품 다완(茶碗)에 관한 실화다. 일본의 어느 도공이 필생의 작업으로 정성을 다해 다완을 만들었다. 요신(窯神)에게 기원하며 가마에 불을 지폈다. 삼주야를 불을 지켰다. 마침내 가마을 열고 다완을 꺼내면서 최상의 한 점에 마음이 흘렸다. 시유(施柚)도 좋았다 번조(燔造)도 놀라와 극치의 다완이라 만족했다.
도공은 그 다완을 깊숙히 간직해 두었다가 받들어 모시듯이 「배알」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어찌된 셈인지 도공은 요괴에 사로잡혀 폐인이 되고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났다. 다완을 보물처럼 간직한 유족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이기만 하면 보는 이가 요괴에 홀려 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수용하는데도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미의 극치는 요괴로 통한다. 아름다움 그 본질이 요괴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의 어떤 여인이 한국의 도공에게 부탁해서 사로매상처럼 아름다운 나부상(裸婦像)을 만들었다. 청자의 비색이 피부결의 속을 들여다 보듯이 맑고 투명해 아름다움이 더 했다. 여인은 거실 상좌에 나부를 모셨다. 그 날부터 여인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거실에서 들려 오는 울음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울음의 주인을 알게 된 여인은 머리카락이 쭈빗해지는 공포에 싸였다. 청자나부상이 울고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여인은 나부를 상자에 넣어 뒷뜰에 묻어 주었다.
중국계 작가 진순신(陳舜臣)씨의 작품에 「경덕진(景德鎭)에서 보내온 선물」이란 단편이 있다. 황제 때문에 아버지를 잃은 딸이 경덕진 가마에서 찻잔을 만들어 복수에 성공하는 이야기다. 심혈을 쏟아 황제가 애용할 수 있는 아름다운 찻잔을 만들었다. 천하일품이였다. 모양은 찻잔이지만 장식은 세상에 둘도 없는 고귀의 극치로 꾸몄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이 닿는 곳을 살짝 눌러 입술이 닿는 곳에 맞추었다.
찻잔을 받은 황제가 천하명품이라고 좋아하며 그것을 애용했다. 얼마 뒤에 황제는 세상을 떠났다. 딸은 원수를 갚았다고 아버지 영전에 고지했다. 딸은 황제의 입술이 닿는 곳에 독약을 넣어 차와 함께 마실 수 있게 찻잔을 만들었던 것이다. 찻잔의 아름다운 장식은 독약을 숨긴 장치까지 뒤덮었다.
사람이 자유롭게 불을 발화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26,000년전이 제2빙하기라고 하니 그로부터 10,000년이 훨씬 넘어 흙으로 토기를 만드는 법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물을 부어 반죽한 흙으로 형태를 만들어 불에 익히면 그릇이 된다는 흙의 가소성과 화학적변화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7,000년 내지 9,000년전이라 추정한다.
그러나 토기의 출현이 언제며 어떻게 형태가 꾸며진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석기인들이 광주리 같은 것에 흙을 입혀 햇빛에 말려 사용하던 것이 토기로 발전했다는 설이 있지만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문명과 도자기전」에 들어서자마자 눈길을 끄는 것은 이집트 토기다. BC 4,000년 전부터 BC 1,100년 사이의 병과 항아리 종류다. 두 가랭이가 벌어진 바지 모양의 6,000년 전의 병이 좀 특이할 뿐 모두가 지금도 시장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의 항아리 같은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내장용기라는 항아리도 우리의 태항(胎缸)과 같은 것에 두껑이 개의 머리 모양인 것이 다를 뿐이다.
메소포타미아와 아나톨리아의 토기는 이집트보다 1,000년 이상 뒤지는데도 모양에 세련미가 돋보일 뿐 기본형태에 변화가 없다. 터키에서 출토된 BC 3,000년의 흑색마연토기수주(黑色磨硏土器水注)는 오히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물주전자 그대로다.
중국의 고대토기 또한 응용형에 불과하다. 산동성 출토의 BC 2,800년의 홍도(紅陶)세발주전자나 BC 1,500년 은대의 백도괴수문쌍이호(白陶怪獸文雙耳壺) 같은 것도 지금 우리 나라 가마에 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기형(器形)이다.
우리 나라도 BC 5,000년경부터 BC 1,000년경까지 약 4,000년간의 신석기시대를 살아왔지만 토기의 유사성은 예외가 아니다. 전시장에 소개된 신석기시대 토기는 암사동에서 발굴된 BC 3,500년의 빗살무늬 토기였다. 박물관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밑바닥이 뾰족한 팽이모양의 토기다. 이것 또한 한국 고유의 형태가 아니다. 그 곁에 전시된 산청에서 출퇴되었다는 BC 600년의 적색마연토기호도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전 시대에 두어도 감쪽 같이 속아 넘어갈 정도로 기본기형이 닮았다.
기형의 조형미는 시대와 민족의 상황에 따라 다소의 보완이 있을 뿐이다. 당나라의 도자기가 두툼한 볼륨을 느끼게 하는 것도 그때의 미인도의 미녀처럼 두둑한 풍만의 표시였다. 사회가 안정되고 문명이 꽃을 피워 사람들의 삶이 윤택해진 것이 기형의 조형미로 나타난 것이다.
도자기문명의 진수는 역시 장식이다. 그 진면모는 뒤에 다시 기회를 얻기로 하고 우선 조형미가 크게 달라진 것 없이 10,000년이 넘는 도자기문명을 이어 오고 있다는 사실에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문명과 도자기전」이 베풀어 주었다는 점을 고맙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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