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참, 너무 그립다.
귓가에 맴도는 여행 소리가 더욱 그립게 만든다. 

딸랑이는 쇠방울 소리. 알프스를 스치는 바람 소리. 목동의 요들송. 이 모든 것이 여행을 부르는 소리다
딸랑이는 쇠방울 소리. 알프스를 스치는 바람 소리. 목동의 요들송. 이 모든 것이 여행을 부르는 소리다

사운드 오브 비 버드

늙었나? 요즘 잠이 없다. 유난히 일찍 출근하던 길, 아파트 단지에서 새소리를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허공에 욕을 하며(가끔 사물과도 싸운다) 새똥을 피해 멀찌감치 돌아갔다. 하지만 이날은 문득 방콕의 어느 아침이 떠올랐다. 댓바람 뙤약볕 속 지저귀던 새들의 합창. 분주한 짹짹 소리에 깨어나고, 유난히 뜨겁던 방콕의 그날 하루가 시작됐다.

정말 벌과 드론 같은 소리를 내는 비 버드. 아니 허밍버드
정말 벌과 드론 같은 소리를 내는 비 버드. 아니 허밍버드

“븅븅~” 페루에서 들었던 벌새(hummingbird) 소리도 기억난다. 헬리콥터처럼 꽃마다 순회하며 뾰족한 주둥이로 꿀을 빨아먹던 벌새, 참 신기했다. 호텔 총지배인을 만나 매우 짠 아침을 먹으며 벌새에 관한 얘기를 한참(영어가 짤막해 대화 내용도 짧았다) 나눴다. 난 왜 그때 벌새를 ‘비 버드(bee bird)’라고 했을까. 왜 한성고등학교 이보용 선생님(영어 과목)은 내게 벌새란 단어를 가르쳐 주지 않았나. 얼굴이 핫팩처럼 달아오름을 느꼈다. 지금도 떠다니는 DJI 드론 소리를 들으면 화들짝 그날의 상황이 떠올라 손발이 오그라든다.

머나먼 산봉우리를 향해 나팔을 불면 산 전체에 울려 퍼지며 세상에서 가장 큰 악기가 된다
머나먼 산봉우리를 향해 나팔을 불면 산 전체에 울려 퍼지며 세상에서 가장 큰 악기가 된다

여행 ASMR 

 

여행은 청각에도 많이 의존한다. 관광(觀光). 보러 가는 것이지만, 들으러 가는 것도 맞다. 시청각 교육이라 하지 않나.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이란 말이 있다. ‘자율감각 쾌감반응’이란 뜻으로 꽤 거창하다. 과학자나 신경과 의사들이 쓰는 말처럼 이런 약어를 쓰면 왠지 멋져 보인다. 이를테면 “ROTC를 제대하고 EU를 둘러보러 FIT(개별 여행)로 가려고 발권했는데, 누구는 TC(여행 인솔자)로 FOC(무료)티켓 받아서 UAE를 가니 억울했다” 같은. 얼마나 대단해 보이는가.


각설하고 ASMR은 뭔가 기분 좋아지는 자극을 말하는데, 유튜브 등 인터넷에선 그런 자극을 위한 영상이나 음원을 ASMR로 쓴다. 그래서 ‘백색소음’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듣기 좋은 소리’란 의미다. 속어론 ‘귀르가즘’이라고도 한다. 전람회의 곡 ‘별이 진다네’ 서두에 흐르는 풀벌레 소리, 푸른하늘의 대표곡 ‘겨울바다’나 최성원의 ‘제주도의 푸른밤’에서의 파도 소리 등 이따금 들려오는 어느 소리는 당장 여행에 대한 동기를 부여할 만큼 기분이 좋은 소리다. 필자 역시 여러 곳을 여행하며 수많은 소리를 귀에 채우고 돌아왔다.

이과수 악마의 목구멍으로 떨어지는 거대한 물. 그렇게 폭포는 세상에서 가장 큰 악기가 된다(아깐 산이 제일 크다더니)
이과수 악마의 목구멍으로 떨어지는 거대한 물. 그렇게 폭포는 세상에서 가장 큰 악기가 된다(아깐 산이 제일 크다더니)

그 소리가 그립다, 그리워

 

“콰과과과고고고” 아르헨티나 푸에르토 이과수(Puerto Iguazu)에서 하루종일 나의 고막을 자극했던 악마의 목구멍(Garganta del Diablo) 낙수 소리는 가끔 환청으로 들린다. 스위스 아펜젤의 어느 언덕에서 누가 불고 있던 알펜호른은 TV나 노래방 배경화면에서 알프스가 보일 때마다 내 달팽이관을 울리고 있다. 어디 이뿐이랴, 사람들의 목소리도 지금 내겐 틀림없는 ASMR이다. “코리안 코리안 롤렉스 롤렉스 베리 칩!” 태국 방콕 팟퐁 야시장 장사꾼의 외침도, 해 질 녘 브루나이 반다르 세리 베가완에서 들었던 청명한 아잔(azn)의 울림도 여전히 또렷하게 남았다.

메타버스로 가상여행을 떠난다고? 어쩔래, 이 경쾌한 파도 소리는
메타버스로 가상여행을 떠난다고? 어쩔래, 이 경쾌한 파도 소리는

내가 여행에서 채우고 돌아왔던 수많은 소리는 다시 귀에서 튀어나와 내게 여행을 떠나고픈 욕망을 지피고 있다. 월정사 템플스테이에서 들었던 풍경 소리와 새벽 염불 목탁 두드리는 소리, 도쿄의 전철 지나는 소음과 까마귀 울음, 프라하 천문시계탑의 종소리, 부산 광복동의 사투리 대화, 한겨울 청송 주산지의 얼음 굉음…. 또 무엇이 있었나. 그래 좌석벨트 램프가 꺼지면 어김없이 흐르는 기장의 기내방송(PA) 목소리가 있다. “현지 기온은 몇 도, 강수확률은 얼마 어쩌고저쩌고….”


그립다. 눈을 감고 가만히 상상한다. 백색소음이라 하면 많은 음원이 검색되는데 이를 통해 잠시 상상 속 여행을 떠나 본다. 일본인이 설계하고 중국인들이 만든 스피커(알리익스프레스는 40일 만에 이 물건을 내게 가져다줬다)를 통해 각종 ASMR을 듣는다. 좀 더 좋은 것을 구매할 걸, 살짝 아쉽다. 왜 영화관이 많은 돈을 들여 하이파이 돌비 스테레오를 구축하는지 알겠다. 상상이니 즐겁다. 그렇게 자신과 타협하기로 했다. 면봉으로 코를 찌르는 대가로 많은 돈을 내지 않아도 되고 번거로운 공항의 시큐리티 체크 중 라이터를 빼앗기지 않아도 되니 좋지 아니한가.


이걸 어쩌나, 얼마나 오랜 시간 묶여 있었는지. 불행히 그런 타협은 이뤄지지 않았다. 염가 스피커에서 흐르는 익숙한 소리들은 금세 나를 여행길에 올려 세우고 만다. 눈이야 찍어온 사진을 보면서 충족시킨다 치자. 이 현장감 넘치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궁둥이가 들썩이다 못해 스카이콩콩처럼 팡팡 튀어 올라 미칠 지경이다. “빵빵 빽빽” 쉴 틈 없이 울려대는 인도 뭄바이와 몽골 울란바토르의 경적 소리마저도 몸서리치도록 그리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필리핀 보라카이 셰프들이 부르는 호객의 노래마저 몸서리치게 그립다
필리핀 보라카이 셰프들이 부르는 호객의 노래마저 몸서리치게 그립다

*이우석의 놀고먹기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강화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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